12. 백 아들 천 손자 거느리고 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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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백 아들 천 손자 거느리고 파
노인으로 젊은이 못지않게 일했던 대통령은 국군이나 유엔군 장성들을 대동하고 일선시찰도 자주 다녔다. 그때는 지금처럼 교통이 좋지 못하여 비행기나 헬리콥터안에서 악천후를 만나면 기체가 몹시 흔들렸다. 그럴때는 동행했던 건장한 장군들도 견디기가 힘들어서 몸을 가누지 못하였는데 제일 나이 많은 대통령만이 아무렇지도 않은듯 버티고 있었다. 곁에서 몹시 멀미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대통령은 어린시절의 즐거운 추억같은 것을 생각하면 고통이 덜어질 것이라고 일러주기도 했다. 그토록 흔들리는 비행기 안에서도 대통령이 태연할 수 있었던 것은 남달리 위장이 튼튼했기 때문이었다.
20대 청년시절 부터 구국운동에 투신했던 대통령은 감옥살이 할때만 끼니를 거르지 않았을뿐 미국에서 고학하며 독립운동을 할때는 사과 1개로 하루를 지내며 배고픔을 견디는 때도 있었다. 배가 몹시 고플때는 냉수를 마시면 고통이 덜했다고 한다. 대통령 재임시에도 경무대에서 더울때면 쥬스보다도 냉수를 즐겼다. 언제나 산책이나 운동이 끝나면 대통령은 냉수 한컵을 마시는 습관이 있었고 시장할때면 으례 냉수부터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꼭 냉수를 들었고 감기가 들면 백비탕(맹물 끓인것)을 계속 마시고 거뜬히 일어났다. 이렇게 대통령은 튼튼한 위장을 타고 났지만 냉수를 마시는 습관이 위장을 더 튼튼하게 해 주었는지도 모른다.
대통령은 미국의 많은 교회와 학교의 집회에서 한국을 소개하고 일본의 학정 밑에서 시달리고 있는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연설을 통해 학비를 보조받고 독립운동도 했다. 특히 조지워싱턴대학 재학중엔 생계가 어려워서 늘 굶주려 쇠약해진 몸으로 공부를 하였다. 그러나 굶주림에 지쳐 힘이 없을 때라도 일단 연단위에만 올라서면 어디서 힘과 열정이 솟는지 한국인 특유의 흥미롭고 박력있는 연설로 청중을 매료하여 감동시키고 끝날때는 늘 박수갈채를 받거나 기립박수까지 받았다.
1907년 6월 13일 위싱턴포스트지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기사에서 [리승만씨는 한국과 그 국민의 풍습에 관해서 100가지 이상의 흥미있는 얘기를 했다. 그는 한국의 양반계급 부인들은 외출을 잘 하지 않기 때문에 그 모습들을 사진으로 보일 수가 없다고 설명하여 폭소를 자아냈다. 그대신 장옷으로 얼굴을 가린채 외출이 허용되고 있는 중류계급 부인들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수백명의 청중이 이 강연에 참석하였다. 이 젊은 한국청년은 폐회할때 열련한 박수갈채를 받았다]고 썼다.
대통령은 그당시 과로와 영양실조로 건강과 성적이 좋지 않아 졸업을 못할줄 알았는데 조지워싱턴대학의 학사졸업장을 받게 되었다. [졸업식에 있어 이 젊은 한국청년보다 더 열렬한 박수를 받은 학생을 없다]고 워싱턴포스트지는 지방주간란에 보도를 하였다. 대학성적이 A학점이상은 서양사뿐이었고 그 이외의 과목은 B와 C학점이었고 수학은 동정점수인 D학점이었는데 서당에서 산수 공부를 한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대통령은 늘 숫자난 계산으로 따지고 드는 편이 아니었지만 친지들의 자녀수와 경무대 직원들의 자녀수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녀들이 많은 사람을 늘 부러워했고 생신때나 성탄절에도 특별히 더 많은 선물을 주었다.
1.4후퇴때 민정시찰을 나간 대통령은 부산역 근방에서 얼굴과 코는 거무스럼하게 그을렸으나 유난히 행복해 보이는 어느 피난민 부부와 그들의 8명이나 되는 자녀들이 함께 어린애들을 업거나 보따리를 메고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헤어졌거나 잃어버린 가족을 찾는 신문광고가 지면에 가득한 때여서 모든 식구가 아무탈 없이 무사히 부산까지 올 수 있었던 행운의 가족으로 보였다.
대통령이 어디로 가느냐고 그 아버지에게 묻자 구포에 사는 사촌 형님 집으로 가는 중이라고 하며 그 많은 식구를 거느린채 별로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다.
올망졸망 따라가고 있는 8명의 어린애들을 보며 나는 아무리 사촌형이라고는 하지만 저 많은 애들까지 환영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걱정이 되어 전시에는 많은 자녀들을 가진 부모님들이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코끼리는 아무리 코가 길어도 자기 코를 짐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부모는 아무리 자식이 많아도 자기 자식을 짐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아프리카 속담을 인용하면서 [참으로 그는 자식복이 많은 행운아야!]하며 부러운듯 말했다. 그리고 대통령은 온가족이 헤어지지않고 한데 모인 그 가족처럼 다른 가족들도 다함께 모일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자신이 6대독자이고 젊은 날 옥중에서 [빈대]라는 시를 지은일이 있는 대통령은 남달리 자녀 많은 사람을 무척 좋아했다.
<빈대>
따뜻하면 기운펴고 차면 오무려
천정으로 바닥으로 오르내리네
하얀 벽을 돌고 돌아 아롱을 찌고
마루 틈을 헐어보면 몰리어 있네
모기와는 연이 멀어 혼인 안되고
벼룩이나 이 쯤은 곁방사릴세
네집은 어쩌다 복많이 받아 백아들 천손자 대를 잇느냐.
부산 피난 당시 대통령은 나에게 [지금 일선에서 싸우고 있는 한국장병들은 모두가 우리의 아들들이야, 당신은 걱정해야할 아들들이 많아]하면서도 어딘지 쓸쓸함을 감추지 못하는것 같았다. 그 당시에는 왜 그토록 대통령이 아들을 원하는가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28년이나 되는 긴세월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늙은 나를 보살펴주고 있는 아들 인수와 며느리 혜자 그리고 큰 손자 병구, 작은 손자 병조와 함께 남편의 산소에 성묘갈때면 참으로 행복하고 자랑스러운 느낌이 든다.
천상의 대통령도 우리 식구들의 다정한 모습을 지켜보며 얼마나 환영하고 반기실 것인가하고 혼자 마음속으로 생각해 본다. 어서 천상의 대통령 곁으로 가야할 나이지만 속으로는 손자 며느리까지 보고싶은 욕심이 생겨서 남이 알까봐 두렵다.
4월이 되면, 생각하면 할수록 불쌍하고 가엾게 자살했던 양자 강석이와 만송의 가족들이 생각나지만 나는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내색을 안했다.
어떻든 젊은 애들을 먼저 구하고 죽어야할 우리가 살아남게 되자 남모르는 마음속의 고통과 괴로움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4월 23일 대통령이 4.19부상학생들을 찾아서 서울대학병원 병실에 들어섰을 때 부상학생들은 모두 대통령을 [할아버지!]하고 부르며 손을 잡고 얼싸 안 으며 눈물을 흘리는 바람에 병실은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었다.
병원에서 돌아온 대통령은 침통한 음성으로 [내가 맞아야 할 총알을 우리 소중한 애들이 맞았어...., 이 바보같은 늙은것이 맞았어야 할 그 총알을 말이야] 하며 비통해 했다.
그날밤 대통령은 죄없는 애들의 고통을 덜어주시고 자기를 벌해 주시라고 기도하며 오직 나라를 위하는 길로 이끌어 주시길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대통령직을 사임해야겠다는 결심은 이미 벌써부터 서 있었다.
그러나, 하야성명을 발표하기 전에 대통령은 그토록 정을 쏟으며 사랑했던 양자 강석이가 경무대 안에서 자기권총으로 부모와 동생을 쏘고 함께 자결했다는 비보를 들었다. 얼마나 노인의 슬픔과 충격이 크고 깊었는지 모른다. 지금은 그때 하야직후 경무대에서 이화장까지 걸어가야겠다고 버티던 대통령을 억지로 차에 태웠던 일들이 꿈과 같이 느껴진다.
세월이 모든 것을 잊게해주고 마음의 상처를 아물게 해준다지만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질듯 아플때가 있다.
강석이를 양자로 맞은 후에 한 식구가 늘게되자 우리는 웃을 일이 더 생겼고 대통령은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그애가 오면 함께 먹을테니 아껴두라고 늘 부탁했다. 식탁에서도 이것저것 권해서 잘 먹는 것을 보면 어느 아버지와 다름없이 대통령은 무척 기뻐하고 대견해 했다. 그애가 현관문에 들어서면 반기면서 빨리 먹을것을 챙겨오라고 재촉하거나 어쩌다 목욕하고 있는 것을 알게되면 등을 밀어 주겠노라고 목욕탕문을 두드리며 장난을 하던 대통령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사람의 정이 무엇인지 그토록 정을 쏟았던 아들의 자결 소식은 많은 나이와 함께 대통령의 건강을 영원히 빼앗아간 계기가 되었다.
그 뒤에 대통령은 실어증까지 겹쳐 그 유창한 영어를 모두 잊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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