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호랑이도 제굴로 돌아간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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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따뜻한 온돌방이 좋아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한 후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걸어갈 뜻을 결심하자 나는 경황 중에도 대통령이 경무대 뒷산을 산책할 때 신던 헌 신발을 신게 하였다.
그리고 주방으로 내려가 찬장 서랍을 열고 대통령의 수저와 젓가락 그리고 아침마다 식탁에서 읽던 성경과 반쯤 남은 작은 찻병을 핸드백에다 챙겨 넣고 따라나섰다. 이 차는 밀 껍질과 호밀의 겨를 함께 까맣게 볶아서 빻은 포스툼(postum)이라는 구수한 영양차인데 미국 몬태너주에서 농사를 짓고있는 [전인수]씨 부인이 보내준 것이었다.
대통령의 영문저서 <Japan Insied of Out- 한글번역 : 일본군국주의 실상),
1939년 집필, 1941년 여름 출간
전씨 내외는 대통령의 독립운동을 도왔으며 그들이 농장을 시작할 때는 대통령이 그곳에 가서 목수일을 도와준 일이 있었다. 그 후 1941년 초에 전씨 내외는 대통령의 영문저서 <Japan Insied of Out- 한글번역 : 일본군국주의 실상)출판을 위해 경비를 부담했다.
대통령은 보내온 그 차를 마실 때면 전씨 내외의 애국심과 그 성실하고 곧은 마음씨를 칭찬하며 그 옛날 몬태너의 넓은 들에서 함께 목수일을 하던 날을 회상하고 즐거워 하였다. 나는 대통령이 여행을 하거나 낚시질을 하러 갈 때면 이 차를 끓여서 보온병에 담아 김밥이나 샌드위치와 함께 가지고 따라 나섰다.[전인수]씨 부인은 대통령의 하와이 요양시절은 물론 타계한 후에도 줄곧 이 차와 함께 노인용 비타민을 나를 위해 보내주었다. 부인의 뒤를 이어 야채농장과 트럭운전까지 하며 열심히 일하고 있는 딸과 지금도 서로의 소식을 교환하고 있다.
대통령이 영광의 자리에 있을때는 누가 참으로 진실되고 의리있는 사람인지 알기가 힘들었지만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는 그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인품이 곧고 바른 분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대통령의 고심을 이해 하였고 끝까지 의분심을 가졌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으며 마음속으로 감사하고 있다. 공직을 사임 하였으니 홀가분한 마음으로 걸어서 집에 가겠다는 대통령의 생각은 경무대로 달려온 사람들의 만류로, 결국 우리는 차에 오르게 되었다.
연도의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손을 흔들어 주었고 이화장 앞의 마당에는 동네 사람들과 시민들이 모여 대통령을 박수와 만세로 맞아주었다. 대통령도 손을 들어 답례를 보내며 감격하여 눈시울이 젖어있었고 나도 목이 메었다. 차에서 내리자 대통령은 사람들이 잘 보이는 담옆으로 올라가서 [여러분, 우리 집에 놀러들 오시오!]하고 말했다.워낙 사람을 좋아하는 대통령은 한없이 서있고 싶어했지만 나는 대통령의 건강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로 무거운 짐을 벗게되어 편해지긴 했지만 나라와 국민의 앞날을 무척이나 염려했던 대통령은 마음을 놓지 못하였다. 공산당은 물론, 사사건건 자기나라의 이익을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강대국들의 간섭과 영향을 받고 있는 우리나라의 실정은 어떠한 곤경에서도 외세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나라와 민족의 권리와 자유를 옹호할만한 줏대있는 지도자가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화장에서도 대통령은 밤중이나 새벽이나 우리 민족의 살 길을 밝혀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그토록 나라와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노인의 가슴속에 깊이 응어리진 슬픔과 괴로움을 이겨내지 못한채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한평생 온갖 역경을 도맡아 고난을 이겨내면서 너무도 많은 슬픈 일들을 겪으며 살아온 대통령이었기에 노경에 닥친 그 커다란 충격도 묵묵히 견디어 내는 것이었지만, 곁에서 보기엔 너무나도 안타깝기 그지 없었다.
이화장의 생활은 경무대의 생활에 비해 시간적으로 좀더 여유가 있어 자유로왔고 경무대의 낡은 다다미방 침실에 비해 온돌방의 아늑함이 대통령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것 같았다. 대통령은 나라일 보는 사람이 자기집을 고치게 되면 그런데서 부정부패가 싹트게 된다고하여 이화장은 물론 경무대 수리도 지붕이 새는 것을 막는 일외에는 손을 대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우리가 진해에 내려가 있는 동안에 경무대의 베란다 수리를 했다가 혼이 난 경무대 직원들은 다시는 대통령의 허락없이 경무대를 수리할 수가 없었다. 대통령은 일본식인 경무대의 방들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국가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다다미방인 침실을 우리가 입주한 뒤에도 개조하지 않았으며 목욕탕만은 욕조가 너무 좁아서 욕조 한편을 파내서 다리를 뻗을 수 있게 했을 뿐이었다.
강석이가 양자로 왔을때도 우리 침실 옆의 방을 내주면서 떨어진 다다미쪽을 대통령이 손수 수리를 했고 감기 들까봐 문풍지만 부지런히 발라주었다. 그리고 이화장의 경우는 콜터 장군이 지낼 마땅한 집이 없다고 하여 빌려준 일이 있어서 온수를 쓸수 있는 등 콜터 장군에 의해 설치 된 몇가지 편리한 시설이 마련되었었다. 그러나 콜터 장군이 수리한 노고도 보람없이 좀 까다로왔던 그의 부인은 겨우 두달을 이화장에서 살고 겨울을 지내기에는 너무도 불편한 냉동창고라고 혹평을 하면서 다른곳으로 이사해 버렸다.
아내를 위해 너무나 애를 쓰는 콜터 장군을 가엾게 생각한 대통령은 넌지시 부인 길들이는 법을 장군에게 일러주기도 했지만 효과는 별로 없었다. 콜터 장군이 자기 부인을 위해 해놓은 시설은 내가 이화장 살림을 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전력의 소모가 많은 것이 탈이었다. 다행히 콜터 장군 내외는 온돌을 그대로 썼기 때문에 아궁이에 불만 때면 훈훈하고 따뜻한 아랫목의 재미를 대통령은 만끽할 수가 있었다.
대통령은 이화장에서 보다 많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만나는 즐거움을 가지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대통령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기 때문에 마음이 든든했지만 때로 불안한 생각이 들때도 있었다. 반공포로의 석방으로 자유를 찾게된 청년들은 대통령의 안위를 지키겠다는 굳은 결의를 보여주었다.
대통령은 여전히 규칙적인 생활을 하며 틈나는대로 정원의 나무들을 손질하고 이화 장의 창틀과 문짝들도 직접 연장을 가지고 손질하였다. 나도 마음속의 시름을 잊기위해 가끔 현관앞 정원 한 모퉁이에서 은방울꽃을 가꾸며 대통령이 나무를 전지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다. 은방울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으로 대통령이 나를 위해 손수 심어준 것이었다. 그 꽃은 지금도 해마다 그 작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 내마음을 위안해 주고 있다.
하루는 집안 조카뻘되는 이갑수씨 내외가 이화장으로 대통령을 뵈러 왔을때 돌계단위의 나무를 손질 하면서 [이제는 정치하는 사람들 중에 곧 일본 사람들을 끌어들일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고 하던데]하면서 대통령은 무척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애급을 탈출한 후 그들의 노예근성을 뽑아버리기 위해 광야에서 40년 동안 얼마나 애썼는가를 대통령은 항상 기억하고 있었다. 해방후 귀국하여 대통령은 갈라디아서에 있는 성경 구절을 인용 함녀서 [주님이 너희를 자유케 하였으니 두발로 굳게 서서 다시는 노예의 멍에를 메지말라]는 말을 젊은 동포들에게 자주 일러주었다.
우리가 이화장으로 옮겨운 후 더 자주 만날 수 있게된 친척들은 생일이나 명절때만 해왔던 음식들을 대통령을 위해 만들어 왔다. 경무대 시절에는 대통령이 좋아하는 식혜를 내손으로 만들었는데 친척들이 만들어 보내오는 바람에 내가 만들 기회는 거의 없었다.
한번은 오후의 산책을 마치고 정원의 벤치에서 대통령과 함께 냉수를 들며 라디오 방송을 듣고 있을때 을생이라는 대통령의 큰누나의 손녀딸이 대통령이 좋아하는 튀각을 해가지고 찾아 왔었다. 을생이는 중년부인이었는데 대통령이 열심히 듣고있는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보더니 대통령에게 [할아버지, 그 라디오 저 주세요!]하고 말했다. 대통령은 [이 라디오는 할머니한테 물어 봐야해] 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항상 어떤 것이나 거의 내 의사를 물어보는 법이 없이 주어버리던 대통령이 처음으로 아내인 나의 의사를 물어보는 것이 고맙기는 했지만 어딘지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 라디오를 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워낙 대통령에게 필요한 물건이 되어 줄 수가 없노라고 거절했었는데 늘 마음에 걸렸다.
일요일에는 정동교회에 가서 교우들과 함께 예배를 보았다.
이화장에서 대통령의 일상생활은 별 불편이 없었지만 대통령의 건강과 휴양을 위해 하와이로 가서 한 두주일 쉬고 오시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측근의 제의를 받게 되었다.
14. 집 없는 나그네
정신적으로 몹시 큰 타격을 받았던 노인의 건강을 위해서는 전지요양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의사의 제의가 있었다. 지금 여기에는 그 당신의 일들을 모두 이야기할 수 없지만 알게될 날이 있을 것이다.
5월 24일 하와이 동지회장 최백렬씨로 부터 대통령에게 꼭 필요한 휴양을 하실 수 있도록 체류비와 여비 일체를 부단해 드릴테니 하와이를 다녀가시도록 하라는 내용의 초청전보를 받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2주일 내지 한달 정도 하와이를 다녀올 수 있는 짐을 챙겼다.
5월 29일 상오 7시 우리는 이화장을 출발했는데 떠나기에 앞서 대통령은 마당에 모여있던 사람들에게 [늦어도 한달 후에는 돌아올테니 집을 잘 봐줘]하고 부탁했다.
김포비행장으로 가는 연도에는 평화스러운 초여름의 농촌 풍격이 펼쳐져 있었다. 논에 가지런히 심어놓은 모를 바라보며 대통령은 풍년을 비를 시를 한 수 읊었다.
공항에는 허정 수반과 이수영 외무차관이 나와 있었다.
비행기 조종사와 승무원들이 아침식사를 하러 내려간 동안 기자들이 비행기 안으로 와서 회견을 요청했으나 우리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때 기내에서 세관원들이 들어와서 우리의 소지품을 모두 검사하였다. 우리의 짐은 전부 4개였는데 대통령의 옷이 들어있는 트렁크 하나와 내옷과 소지품을 챙겨넣은 트렁크 그리고 마실것과 점심과 약품이 든 상자와 평소에 쓰던 타이프라이터였다.
세관원이 보지않은 것은 내 호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라이터였다. 그 라이터는 내가 이화장 현관을 나오기 전에 응실식 탁자위에서 무심코 집어 넣은 것이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대통령이나 나에게 꼭 필요한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것을 집어 넣었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다.
하와이에 도착한 후 독립운동 당시의 옛 동지들과 사랑하는 제자들을 만나게 된 대통령은 한결 즐거운 듯 하였고 건강도 졸아지는 듯 싶었다. 우리는 조경사업을 하고있는 윌버트 최씨의 별장에서 기거하며 옛 동지들과 제자들의 방문을 받기도 하고 초대석에 나가기도 하였다.
매주 일요일에는 독립운동 당시 대통령이 창립한 한인 기독교회에 참석하여 다정한 교우들과 함께 예배를 봤다.
대통령은 옛날 이 교회 중앙에 태극기를 걸어놓고 교포들과 함께 예배를 보았으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늘 기도를 드렸었다.
우리가 예정했던 하와이 체류가 한달이 지나자 대통령은 한국에 돌아갈 생각으로 최백렬씨 등 우리를 초청해준 인사들과 상의를 하였으나 모두가 아직 좀 더 요양을 하시도록 만류를 거듭하는 것이었다. 이와같은 권고는 당신의 국내사정을 알고 하는 이야기였으나 이 당시 완전히 정치를 떠난 한 고령의 노인으로서 고국에 돌아가고 싶은 대통령에겐 안타까운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남의 별장에서 한없이 신세를 질수는 없는 일이어서 결국 윌버트 최씨와 옛 동지들이 호놀룰루시 매키키가에 우리의 주거를 마련해 주고 생계도 보살펴주게 되었다. 주거가 정해지자 옛 동지들이 쓰던 가구나 전기밥솥과 찌개를 끓일 남비며 김치와 한국음식을 해 먹는데 필요한 그릇 등을 가져다주어 우리 두 식구가 살수있는 간단한 살림살이가 마련되었다.
우리는 옛 친구들의 이와같은 호의와 주선에 감사하였다. 이토록 우리를 보살펴준 사람들중에는 대통령이 경영하던 한인 기독학원의 옛 제자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대통령을 친부모 이상으로 공경하며 사랑으로 받들었다. 우리의 생활은 단조로왔으며 나는 워싱턴에서의 독립운동시절과 같이 살림을 꾸려나갔다. 우리를 도와주는 동지들과 제자들에게는 미한한 마음이 들었으나 우리는 이런 생황이나마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하였다.
단 두식구가 사는 간단한 살림이었지만 나는 하루종일 쉴새없이 일했다. 나는 집안 을 청소 할때마다 창문의 유리를 두 장씩 닦아 나갔다. 그렇게 하면 1주일이 지나는 동안 닦아야할 집안의 유리창문은 모두 나의 손을 한번씩 볼수가 있어서 깨끗한 창문을 유지하게 되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넓지 않은 마당에 나가 화초에 물을 주기도 하고 나무에 손질을 하며 마음속의 시름을 달래었다.
대통령은 이때도 무슨 음식이나 잘 들었고 체중이 주는 일이 없었으므로 나는 항상 과식을 삼가하도록 배려하였다. 체중이 늘면 고혈압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며 특히 노인의 건강에 해롭기 때문이었다. 나는 대통령의 보행운동을 위해 매일 시간을 정하여 옥외로 함께 나가 산책을 했다.
이렇게 1960년 한해를 하와이에서 넘기게 되자 1961년 설날 나는 떡국을 끓여 대통령에게 아침식사를 들게했고 친지와 교포들이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세배를 와서 우리를 기쁘게 해 주기도 했다. 3월 26일 대통령의 생신날에는 하와이의 교포들이 탄신축하의 모임을 만들어 대통령을 위로하여 주었다. 그러나 대통령의 고국을 그리는 마음은 날로 더하여만 갔고 나라에 대한 걱정도 커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6대독자인 자기 때문에 남달리 고생만 하시다가 멀리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아들을 그리시며 홀로 쓸쓸히 돌아가신 아버님 이야기를 하면서 대통령은 선영을 돌볼 아들이 없음을 토로하기도 했다.
대통령은 구한말 구국운동을 할때 쫓기던 몸이 되어 어머니의 임종도 못한 불효자임을 늘 마음속으로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침내 새로 양자를 맞이할 것을 상의하였다. 누가 한국에 가서 이 어려운 일을 해줄 것인가를 골똘히 생각한 끝에 우리는 뉴욕에 있는 이순용씨에게 이 일을 부탁하기로 했다. 이씨는 대통령과 독립운동을 했고 한때 내무부장관을 지낸일이 있었는데 그는 우리의 통지를 받자 곧 호놀룰루로 와서 대통령을 만났다.
대통령은 [내가 이런 처지에 있는데 나에게 누가 아들을 줄 사람이 있겠는가]하며 이순용씨의 손을 잡고 간곡히 부탁을 하였다. 대통령을 위해 양자를 구하러 한국에 왔던 이순용씨는 한때 정부의 오해를 받아 연금을 당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기도 하였으나 마침내 인수를 입양하도록 하는데 성공했다.
양녕대군파 종친회의 추천으로 조카뻘이 되는 계대를 맞춰 입양하게된 인수의 사진을 보게된 대통령의 표정은 하와이에 온 후 가장 밝은 것이었다. 대통령은 그날부터 인수가 오기를 기다렸으며 수속상 시간이 걸리게 되자 [그 놈이 정말로 나를 좋아한다면 더 서둘러 빨리 와야할 것이 아닌가]하며 마음을 썼다.
이로써 대통령은 생활에 새 활력을 느끼며 나에게 공잘 농담도 걸어왔다. 종종 거울까지 들여다보며 젊은이처럼 [그녀석도 내가 저를 좋아하듯이 나를 좋아하겠지]하고 나에게 묻기도 했다.
드디어 1961년 12월 13일 대통령이 그토록 기다리던 인수가 도착했다. 대통령과 나는 번잡을 피하기 위해 공항에 나가지 않고 집의 테라스에 나가 인수를 기다렸다. 대통령은 어느덧 상기된 표정이었으며 마당을 들어서는 인수를 바라보자 기쁨을 억누르지 못하며 손을 흔들었다. 인수는 층계를 올라와 우리나라 재래식인 큰절을 하였다.
대통령은 인수의 손을 잡고 등을 어루만지면서 어찌할바를 몰랐다. 첫 대면이었지만 두사람은 오래 떨어져 있던 부자간 같이 다정하였다. 우리는 따라온 기자들을 위해 사진을 찍도록 해 주었다.
대통령은 곧 인수의 손을 잡고 방에 들어가 [지금 우리나라가 어떻게 돼가지?]하고 물었다. 인수는 [지금 많은 사람들이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 잘 되어갈 것입니다. 염려 마십시오]라고 대답하였다.
대통령은 [그런가? 나라가 잘 되간다면 그것은 참 좋은 일이야, 그런데 너는 남이 잘 된다, 잘 된다 하는 소리 아예 믿지 마라.... 이렇게 절단이 난걸..., 그렇게 우리나라 일이 쉬운게 아니야]하고 침통한 표정이었다.
나는 침통해진 대통령의 얼굴을 보고 인수에게 뒷뜰이 보이는 마루방에 마련된 환영식탁으로 어서 모시고 나오도록 하였다. 우리가 아들을 맞는 경사에 친지와 제자들이 축하의 인사로 김치는 물론 고비나물까지 한국음식을 골고루 마련해 와서 우리가 매키키가에 살림을 차리게 된 후 조촐하나마 가장 큰 잔치가 벌어졌고 나는 오랫만에 대통령의 즐거운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15. 귀국에의 열망
하와이에 와서 보행마저 불편해진 대통령은 무척이나 외롭고 쓸쓸해 했는데 아들 인수가 와서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객지에서 건강이 나빠진 고령의 노인이 아들을 곁에 두게되자 많은 위로를 받게 되었다. 특히 매일 인수가 예의를 갖추어 아침문안을 드릴때마다 몹시 기뻐하였다.
우리 세식구는 아침 7시반에 일어나고 8시반에 식사를 했는데 식사전에 대통령이 기도를 했다.
아침 식사는 과일쥬스 한컵과 빵을 먹었다.
아침 식사가 끝나면 인수와 내가 번갈아 가며 성경과 신문을 읽어드렸는데 대통령은 인수가 읽으면 더 좋아했다. 내가 아침 설겆이를 하는 동안 대통령은 인수의 부축을 받으며 테라스로 나가서 바깥 공기를 쐬었다. 10시반이면 대통령의 운동시간인데 부엌에서 약 10m쯤 떨어진 마루방까지 10회를 왕복하는 일이다.
이것은 의사의 권고에 따라 다리의 보행력을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운동으로 대통령은 인수의 부축을 받아가며 걸었다. 이동안 나는 세탁을 하고 점심식사 준비를 했는데 정오에 점심식사를 했다. 점심은 그날의 식단에 따라 만든 반찬과 밥과 김치였다.
김치는 대통령의 고혈압을 생각해서 아주 작은 부분을 접시에 놔드렸는데 대통령은 늘 인수앞에 놓인 김치그릇에서 더 집어다 들었다.
점심 설겆이 할때는 인수도 거들었다. 점심식사 후 약 1시간은 온식구가 낮잠을 잤다. 대통령은 건강이 좋았을 때는 이 오수시간 후에 마당에 나가 꽃에 물도 주고 나무손질도 했었다. 저녁식사는 하오 6시에 했는데 주로 밥을 지었지만 때로는 국수를 들기도 했다. 아버지와 아들이 똑같이 식성이 좋았기 때문에 반찬이 좋든 나쁘든 우리 식탁위의 그릇들은 설겆이가 필요없을 정도로 깨끗이 비워졌다.
특히 떡국을 끓일때는 부자가 대환영이었으며 인수는 세그릇이나 들어 우리를 놀라게 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겐 염려할 정도로 떡국을 여러그릇 들었지만 문제없었다. 저녁 설겆이를 마치면 보통 7시가 넘었는데 약 10분정도 성경을 읽고 대통령의 저녁기도가 끝나면 8시에는 모두 침실에 들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간에도 나를 안타깝게 해주는 것은 자나 깨나 귀국할 일념뿐인 대통령이 또 하루를 하와이에서 보낸것을 못견디게 괴로와 하는 일이었다. 그러면 나는 인수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대통령을 부축하고 인수의 방으로 갔다.
대통령은 인수에게 우리나라로 가는데 드는 여비가 얼마인가를 묻고 [도대체 내가 언제 우리땅에 가게 되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최백렬씨와 윌버트 최씨가 환국여비를 대주기로 했다고 누차 얘기 했지만 대통령은 [내가 우리땅을 밟고 죽는 것이 소원인데 여기서 죽으면 어떻게 해.... 모두 어떻게 할 작정이냐?]하며 상기된 눈에 눈물이 가득 맺혔었다.
나도 인수도 울고 싶은 심정을 억누르고 기어이 소원을 풀어드리겠노라고 설명을 드려 겨우 침실로 돌아오곤 했다. 아침식탁에서도 인수에게 멀리 우리나라 하늘을 가르키며 [저기가 서편이야 바로 저쪽이 우리 한인들이 사는데야]하며 대통령은 그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아니, 식사는 안드실 생각이세요?]하고 주의를 환기시켜드리면 매우 못마땅한듯이 [왜?]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인수와 둘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눌때면 [지금 우리나라에서 누가 남북통일을 하려는 이가 있나?]하고 묻기도 하고 [내 소원은 백두산까지 걸어가는 게야]하거나 [그래 일인들은 어떻허구 있누?]하면서 종일토록 걱정을 하기 때문에 나는 인수에게 [아버님의 병환은 바로 나라걱정과 환국하실 걱정이니 항상 말조심을 하라]고 일러주었다.
나의 일과중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일들은 대통령을 뵙고자 찾아오는 사람들을 맞고 우리의 어려운 처지와 생활을 이해하며 도움을 주고있던 분들에게 감사의 편지와 답장을 쓰는 일이었다. 이중에는 맥아더 장군, 헤리스 목사. 밴플리트 장군, 화이트 장군 등 많은 미국친지들이 있었고 당시 공무로 하와이에 왔던 렘니찌 장군은 바쁜 일정 중 점심시간마저 할애하면서 대통령을 찾아와 우리를 기쁘게 해 주었다.
특히 고국에서 김이나 마른반찬감을 선물로 보내주는 사람들과 봉투에 10달러 5달러씩 넣어 보내주는 미주 동포들의 온정을 대할때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곤 했다. 그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에 관해 터무니 없는 낭성을 만들어내는 이가 있었고 심지어 이화장에 있던 우리 물건을 몽땅 실어가버린 정치인도 있었지만 김인서목사님같이 용감한 분들은 그후 [망명노인 리승만박사를 변호함]이라는 책자를 발간하여 우리에게 보내주었다.
인수와 함게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가끔 대통령은 가슴에 북받치는 격정을 누를 길이 없을 때가 있었다. 그럴때마다 인수는 [걱정마십시요. 아버님의 뜻을 받들어 애국하는 젊은이들도 많습니다. 아버님의 뜻은 결코 어버님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애국청년에 의하여 계승됩니다]하고 위로해 드리면 [그래 그렇다. 그까짓 다 지나간 일이야]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대통령이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상해에 갈때 중국인의 시체를 운반하던 배로 선편을 마련해 준 보스윅씨는 우리를 볼때마다 내 핸드백에다 대통령의 용돈을 넣어주곤 했는데 그는 대통령의 귀국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동정한 나머지 우리를 전송하고 돌아서면서 자기도 우는 것이었다.
마음이 환국문제로 가득차있던 대통령은 1961년 성탄절에 교포 김학성씨가 초청해준 만찬회에서 어린이들을 보고 몹시 기뻐하며 [나는 곧 한국한다]라고 자랑삼아 얘기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모두 웃기도 했다.
대통령은 자기의 환국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보고 일본의 속셈과 강대국들의 뱃심이 한일 관계에 자신이 끼칠 영향을 생각해서 귀국을 못하게 누가 조종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했다. [온 천하에 못된 놈들....]하고 대통령이 흥분하기 시작하면 나는 최백렬씨를 불러댔다. 최씨는 대통령이 가장 사랑하는 제자의 한사람으로 서로는 부자지간 같이 대하였다. 최씨가 오면 대통령은 흥분을 가라앉히는 것이었지만 건강이 나빠질수록 환국의 뜻은 점점 굳어만 갔다.
[나를 앞으로 20년간 여기다 붙잡아 둘 작정이냐]하고 역정을 내면서 [괘씸한 놈! 내가 걸어서라도 떠날테야]하며 신발을 찾는 일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나는 주치의의 [지금 시기가 지나면 비행기 여행조차 불가능하다]는 의견과 조국의 땅을 밟아보고 죽겠다는 남편의 뜻에 따라 1962년 3월 17일을 귀국일자로 잡았었다.
최씨의 주선으로 모자와 오버코트가 준비되고 우리는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집을 마련해준 윌버트 최씨는 그집을 팔 예정이었다. 한편 최씨는 우리를 위해 비행기를 예약하고 교포들이 몰려와서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대통령은 출발예정인 사흘전부터 보행난으로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게 되었으나 섭섭해하는 교포들에게 환국의 기쁨을 감추지 못하여 [우리 모두 서울가서 만나세]하고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3월17일 출발의 날이 밝자 간단한 아침식사를 끝낸 대통령은 외출복을 입고 쇼파에 앉았다. 최백렬씨가 왔으며 우리 영사관에서 전화연락이 있은 후 9시 반에 김세원 총영사가 내방하였다. 대통령 곁에는 최백렬씨와 인수가 앉아있었고 내앞에는 윌버트 최씨와 김총영사가 자리를 잡았다. 의아해하며 바라보는 대통령에게 최백렬씨가 먼저 조용히 말했다.
[이박사님, 우리나라 위해 일 많이 하시고 늘 우리나라 잘되기를 원하고 계신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김세원 총영사가 말씀드리는 것을 바다와 같이 넓으신 마음으로 알아들으시고 나라 위해 한번 더 결심하셔야겠습니다] 그리고 김총영사가 정부의 귀국만류 권고를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조용히 듣고 있던 대통령은 어느덧 눈이 충혈이 되어갔다.
이너 [누가 정부 일을 하든지 정말 잘해 가기를 바라오]하는 것이 대통령의 대답이요 부탁의 전부였다.
그런뒤 휠체어에 몸을 기댄 후 다시는 혼자서 일어나지 못했다.
16. 호랑이도 제굴로 돌아간다는데
오직 내 나라 따을 밟아보고 죽겠다는 일념으로 살고있던 87세의 노인에게 정부의 귀국만류 권고는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나는 너무나도 답답하고 앞날이 막막하여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1962년 초 대통령이 트리폴리 육군병원으로부터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진단결과를 통보 받았을때 나는 아들 인수를 붙잡고 함께 울었다. 다시 커다란 충격을 받고 일어나지 못하는 대통령과 함께 하와이에 주저앉게 된 그때처럼 우리의 처지와 형편이 암담한 때는 없었다.
먼저 인수는 대통령을 위해 그래도 귀국의 길을 열어보겠다는 마음으로 어떠한 일이 닥칠지도 모를 단독 귀국의 길을 택하였다. 그후 한국에서 리대통령의 환국운동이 일어났던 것은 모두가 아는 일이지만 당시의 정부가 막고 나서는데 그 실현 가능성이란 도무지 있을 수 없었다. 다만 우리는 지금도 그때 리대통령의 환국을 위해 운동을 전개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릴 따름이다.
귀국이 실현되지 못한 채 어려운 나날을 보내고 있던 우리에게 동정을 표하고 호의를 베풀어 주었다. 이중에도 모나라니 요양원의 원장 존슨여사는 대통령을 무료로 입원시켜 간병해줄 것을 제의해 와서 나는 얼마나 다행하고 감사했는지 모른다.
나는 1962년 3월22일자의 이 고마운 존슨여사의 편지를 지금도 고이 간직하고 있다.
이 요양원에는 우리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었던 윌버트 최씨가 그 후원자로 있었고 또한 대통령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며 교포사회에 공헌이 컸던 민찬호목사가오랫동안 요양했던 곳이기도 했다. 존슨여사는 대통령을 잘 알고 있었고 참으로 존경하는 마음에서 도움이 되고자 하였다. 특히 민찬호목사의 아드님 토머스 민박사는 대통령이 별세하기까지 높은 언덕배기에 자리잡은 모나라니 요양원을 오르내리며 주치의로서 모든 편의와 도움을 무료로 봉사해 주었다.
그리고 대통령의 하야와 동시에 하와이에서 총영사직을 사임했던 오중정씨도 한결같이 곁에서 우리를 도와주었다. 그는 1985년 광복 40주년을 기념하여 국내외 인사들의 정성을 모아 호놀룰루시 릴리하가에 있는 한인기독교회 마당에 리대통령의 동상을 세우는 일을 주관하였다. 이 교회는 리대통령이 독립운동을 위해 설립하였으며 교포사회에서 민족정신의 근거지였다.
그리고 내가 존슨여사에게 고마왔던 일은 모나라니 요양원에서 나에게 간호보조원의 직책을 허락해 준 일이다. 이로써 나는 남편의 병상을 지키며 병원의 부속건물 방에서 나의 생계를 이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당시 정부와의 관계는 호놀룰루 영사관에서 두어차례 화분을 보내온 것이 그 전부이었으나 독립운동의 동지이던 교포들과의 관계는 한결같이 다정스러운 것이었다. 최백렬씨와 김학성씨내외 최성대씨.거투르트 리.정순예 김.살로메 한씨 등 기독학원 시절의 제자들은 물론 많은 사회인사들의 위문내왕이 잦았고 대통령은 그들을 만나면 반가와 하였다. 그러나 대통령은 잠시도 귀국 일념을 버린적이 없었다.
하루는 존슨여사가 여러병실을 돌아보다가 대통령의 병상이 있는 202호실에 들렸다. 병상에 누워 무엇을 생각하는데 여념이 없는듯한 대통령의 표정을 본 존슨여사는 [리박사님!]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부르며 [소원이 무엇이지요?]하고 물었다.
대통령은 [여비요. 한국으로 돌아갈 여비요]하고 대답하였다. 이 말을 들은 그녀는 [아직도 리박사님은 한국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고 계셔요?]하고 묻자 [그렇소]하고 대통령은 대답했다.
이때 인수가 하와이로 두번째 와서 대통령의 병상을 함께 돌보던 때였다. 늘 대통령의 머리속엔 고향산천의 풍경이 완연한양 한국에서 누가 오면 [지금도 서울 청량리 밖에는 누런 벼이삭이 굽이치고 있는가? 언제 다시 그것을 보고 죽을 수 있을런지]하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어릴때 그곳에서 메뚜기를 잡고 남산에서 연날리기하던 시절의 추억을 이야기 하기도 하였다.
노인의 건망증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어서 대통령은 으례 여비가 없어서 귀국을 못하는 것이려니 생각했었다. 그리하여 매카키가에서 살 때에 돈을 아끼기 위해 이발도 아니하고 시장에서 사오는 식품봉지가 크면 [귀국할 여비를 쓴다]고 나와 인수를 나무랐었다. 대통령은 우리가 돈을 쓰거나 무엇을 사오면 하도 걱정을 많이 하기 때문에 금요일마다 1주일 먹을 식품을 구입해 오던 나는 늘 대통령이 신경을 덜쓰게 하기위해 조심을 했었다.
그리고 대통령은 아들 인수의 교육문제를 걱정하였는데 [저녀석이 공부를 더해야 할텐데 내곁에서 허송세월하면 어떻게 하나?]하고 늘 말하는 것이었다. 그때 인수는 이미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서 대학원 석사과정에 있었으나 대통령은 어떻게 해서든 공부를 더 시킬 궁리만 했다. 인수는 겹치는 가사로 인해 어려움이 많았지만 늦게나마 공부를 계속하여 뉴욕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게된데 나는 보람과 기쁨을 느꼈다. 대통령도 천상에서 기뻐하리라 생각한다.
모나라니 요양원으로 옮긴 후 대통령은 잠은 잘 자는 편이 아니었으나 식사는 여전히 잘했다. 대통령의 병세로 고령의 노인에게서 보는 동맥경화증이 점차 심해지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병상에 누운채 의사표시를 제대로 할만큼 말도하고 의식이 있었지만 무척 힘드는 환자에 속했다.
첫째로 대통령은 워낙 약을 싫어하는 성품이었기 때문에 약먹일 때는 참으로 힘이 들었다. 오랜 병상생활에서 대통령은 힘이들면 [아이고, 아이고...]하며 괴로와 할때도 있었고 한때 열이 심할때는 [어머니, 어머니]를 부르며 신음을 했다. 아침에는 사리에 맞는 말을 했지만 흥분한 경우나 오후에는 우리말로만 이야기하는 때가 많았다.
주치의는 두부의 혈액순환관계로 정신상태가 흐리며 노쇠로 하체는 약해졌으나 식성이 좋아서 비교적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은 병원식사를 싫어했지만 늘 그릇을 깨끗이 다 비웠다. 나는 대통령을 일으키거나 눕힐때는 [하나, 둘, 셋!]하면서 힘을 주었는데 대통령은 넌지시 나를 바라보며 힘을 덜어 주려고 애썼다. 나도 때로 고달프고 괴로울 때는 대통령과 함께 먼 한국의 하늘을 바라보며 아리랑이나 나의 서투른 도라지 타령을 부르면서 위안할 때도 있었다.
병원음식에 질려버린 대통령을 위해 그 좋아하는 한국음식을 열거하며 노래를 지어부르면 따라서 함께 부른적도 있었다.
날마다 날마다 김치찌개 김치국
날마다 날마다 콩나물국 콩나물
날마다 날마다 두부찌개 두부국
날마다 날마아 된장찌개 된장국
그 얼마나 오랜 세월 해외에서 대통령이 고향음식의 맛과 고향산천을 그리며 지내온 나날이었던가. 우리나라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독립에의 희망이 전혀 보이지도 않았을때 대통령은 나라를 위해 싸우고 또 싸우다 죽을 것을 각오한 바이지만 단 한가지 조국의 산천과 겨례의 품안에서 죽게되면 오죽이나 행복할까 하고 늘 생각하였었다.
1964년 4월 말에는 대통령의 별세 후를 생각하여 그 준비차 인수가 한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1965년 6월 말에는 인수를 다시 급하게 불러야만 했다. 대통령의 병세가 위독하기 때문이었다. 인수는 나와 함께 매일 대통령의 병상을 정성껏 돌보았다.
그러나 7월 18일 밤 나와 인수는 대통령의 병상곁에 서서 임종을 지켜보게 되었다.우리들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지만 대통령의 숨결이 거칠어 갈수록 안타까운 마음을 이길 수가 없었다. 그래도 다행한 것은 대통령이 이미 고통의 경지는 벗어났다는 것이었다. 마침내 대통령의 숨소리가 멎자 간호원은 임종임을 알려주었다.
때는 하와이 시간 7월19일 1시35분 이었다.
유난히도 맑은 하늘에서 별빛이 초롱초롱하게 비치는 밤이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참으로 힘들고 슬플때도 많았지만 대통령을 간호하며 함께 지낸 날들이 지금은 행복하게 생각되고 그리워지기도 한다.
병상에서 [호랑이도 죽을 때는 제굴을 찾아간다는데]하고 말하면서 [남북통일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눈을 감을 수 없다]고 하던 대통령을 생각하면 한이 맺힌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오다가다가 만난 님이지만
살아서나 죽어서나 못있겠네
대통령이 나를 위해 지어불렀던 이 노래를 부르면 가슴속에 맺힌 한이 아리랑 고개로 넘어가는 것 같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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