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체스카 도너 > 단상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단상

프란체스카 도너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49회 작성일 23-11-04 13:30

본문

프란체스카 도너(독일어Franziska Donner 프란치스카 도너[*]영어Francesca Donner Rhee1900년 6월 15일 ~ 1992년 3월 19일)는 대한민국의 제1, 2, 3대 대통령 이승만의 두 번째 부인으로 한국명 이금순 또는 이부란이었다. 이승만과 결혼 전 이혼했고, 1931년 빈 회의에 참석차 오스트리아를 방문한 이승만과 만났다가 그와 재혼하였다.

1960년 이승만의 사임 이후 함께 하와이에 가서 생활하다 이승만 사후에는 모국인 오스트리아에 있다가 1970년 대한민국 정부의 허가로 귀국하였다. 오스트리아 출신 귀화인으로 대한민국의 1번째 대통령 배우자이었다. 한국어 이름은 이금순 또는 이부란(李富蘭)이다. 별칭은 호주댁[1]이다.

대한민국의 대통령 역대 영부인 중 최초이자 유일하게 최장수를 기록하였지만 2019년 김대중 전 대통령 영부인 이희호 여사가 향년 96세를 일기로 서거하면서 최초 최장수 자리를 내주었다.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어린 시절의 프란체스카.

프란체스카 도너는 1900년 오스트리아 에서 천주교 가문[2]의 오스트리아 사업가 루돌프 도너의 3명의 딸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들이 없었던 여사의 부친은 영리한 막내딸이 가업을 잇기를 원했고, 부친의 뜻에 따라 영국으로 영어공부를 위한 유학을 떠나 유창한 영어실력을 갖추게 된다. 이 후에 그녀는 1920년 독일의 자동차경주 선수 헬무트 뵈룅과 결혼하였으나 3년만에 이혼하였다.

이승만과의 결혼[편집]

1934년제네바에서 국제 연맹 회의에 참석차 방문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 이승만(李承晩)을 처음 만났고, 모친의 반대에도 재혼을 강행하여 같은 해 10월 8일미국 뉴욕 클레어몬트 호텔에서 결혼했다.

이승만에게 프란체스카는 미모와 세련된 매너, 뛰어난 외국어 실력 등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그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된다. 이승만의 태평양 전쟁을 예고한 명저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는 프란체스카여사의 손끝에서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1934년, 결혼 직후의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그는 한때 ‘호주댁(濠洲宅)’으로도 불렸는데, 이는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도너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한인 교포들과 독립운동가들이 그를 여사라 부르지 않고 ‘호주댁’이라 부른 데에서 비롯한다. 참고로 ‘호주댁’은 그의 출신 국가인 오스트리아가 이름이 유사한 나라인 오스트레일리아로 와전돼서 붙은 이름이다. 한때는 미국 출신이라는 설도 돌기도 했다.[출처 필요] 이승만은 그에게 직접 이금순, 이부란이라는 한국어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다.

한국 입국[편집]

1946년, 방한 중 경교장을 찾아온 피치 박사 부부와 함께. 앞 줄 오른쪽 끝에서부터 조완구김구, 프란체스카, 피치 박사 부부, 뒷 줄 왼쪽 첫 번째는 엄항섭, 세 번째는 이기붕, 네 번째는 안우생, 가운데는 안미생, 오른쪽 첫 번째는 선우진, 네 번째는 서영해.

1945년 10월 이승만과 함께 귀국하였다. 이후 돈암장과 이화장에서 거주하다가 이승만은 1948년 5월 30일에는 국회의장에, 8월에는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프란체스카는 이승만을 따라 경무대로 이주하여 살았다. 1948년 1월 12일 UN한국위원회가 서울에 도착하자 이승만을 따라 회의에 참관하였다.

이후 남편 이승만이 제헌 국회의원과 국회의장에 당선되고,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자 대통령 배우자 자격으로 이화장에서 경무대에 입주하였다. 그러나 경무대 입주 직후 남편 이승만을 만나는 방문객 문제에 일일이 개입하여 보좌관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그는 해방 직후 남편 이승만을 찾아오던 정치인들 중 안재홍을 무시하고, 냉소적으로 대접했다. 결국 안재홍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는 이승만에게 동참했지만, 등을 돌려 1950년 제2대 총선에는 독자적으로 출마하게 된다. 이승만의 측근 윤치영의 비서를 지냈던 최기일에 의하면 프란체스카는 이승만을 찾아온 손님들 중 송필만고희동을 무시하였다.

제1공화국 시절[편집]

남편 이승만이 임영신과 불륜관계라는 소문이 돌자 마자 이유 없이 임영신을 해고하였고, 그 뒤 윤치호의 딸 윤노라가 그녀의 시중을 들다가 이승만의 비서인 이기붕의 부인 박마리아와 윤치영의 부인 이은혜가 프란체스카의 시중을 들게 되었다. 그러나 양반 출신의 고고한 이미지의 이은혜를 부담스러워한 반면 가난한 집안 출신이며 평소에 싹싹한 박마리아를 편애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박마리아와 그녀의 남편 이기붕이 이승만의 최측근으로 발탁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박마리아는 그녀의 총애를 자신의 남편 이기붕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이용한다.

1951년 9월 29일서울 수복 기념식에서 이승만과 이야기하고 있는 프란체스카. 3개 국어를 할 줄 알고, 통역사 자격증을 가진 그녀는 이승만의 타이피스트, 비서로서 역할을 하였다.

청와대의 방문객과 접대 문제에 일일이 개입하면서 이승만의 보좌관이었던 박용만과 외무장관 장택상 등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장택상은 프란체스카에게 밉보였던 박용만을 특별히 배려하여 그녀의 시선과 멀어지도록 자신의 주변으로 발령시켰다.

1955년 11월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3]

생애 후반[편집]

1962년 12월하와이에서 양자 이인수 박사를 맞아 기뻐하고 있는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내외.

1960년 쇠약해진 이승만을 대신해 여러 정책 문제를 자신이 스스로 처결했다. 얼마 뒤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자진 사임한 후 하와이로 휴양차 출국하자 함께 하와이로 떠났다. 거주지를 정하지 못해 수시로 거처를 옮겨다니던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도너는 하와이 한국인 교포단체의 유지인 최백렬(崔伯烈), 오중정(吳重政), 윌버트 최 등의 도움으로 한 빌라에 머무르다가 이승만의 병세가 악화되면서 하와이의 요양원으로 옮겨졌다.

1965년 7월 19일 이승만이 서거하고 그 뒤로도 하와이에서 거주하다가 외무부 장관이 발급한 특별 여권을 소지하고 오스트리아로 갔다. 이후 친정 동생, 친정 언니의 집을 전전하였다.

1970년 5월 16일에 대한민국 정부의 배려로 귀국하였다.[4] 이후 청와대가 주관하는 각종 행사에 귀빈으로 초대되었다. 이후 양자 이인수 내외와 이화장에서 함께 살았다. 만년에는 국립서울현충원의 중단에 안장된 남편 이승만의 묘소를 찾아 참배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1987년 이승만의 전직 비서였던 윤치영의 구순 기념 논문 봉정식에 참석하였다. 1990년 소피텔 엠배서더 호텔에서 90회 생일 축하연을 했다. 이 때 오스트리아에 남아 있던 소수 친지들의 방문을 받았다. 1992년 3월 19일 0시경 서울특별시 이화장에서 향년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며느리인 조혜자 여사에게 남긴 유언은 다음과 같다.[5][6]

어머님[7]은 유언으로 세 가지를 부탁했어요. "틀니를 끼워주고 태극기로 나를 덮어달라. 그리고 성경책을 무덤에 꼭 넣어달라." 이렇게 무덤에 넣은 것 때문에 두 분이 날마다 기도하고 읽으셨던 성경은 현재 남아 있지 않아요. 그런데 영문 성경이 발견되었다니..[6]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회원로그인

회원가입

사이트 정보

회사명 : 회사명 / 대표 : 대표자명
주소 : OO도 OO시 OO구 OO동 123-45
사업자 등록번호 : 123-45-67890
전화 : 02-123-4567 팩스 : 02-123-4568
통신판매업신고번호 : 제 OO구 - 123호
개인정보관리책임자 : 정보책임자명

  • 게시물이 없습니다.

접속자집계

오늘
557
어제
386
최대
1,156
전체
68,092
Copyright © 소유하신 도메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