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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파 구본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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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70회 작성일 23-05-06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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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0월에 발행된 문학사상 창간호의 표지화는 구본웅(具本雄, 1906~1952)의 그림 ‘친구의 초상’이었다. 야수파의 힘찬 운필에 실려 귀기를 뿜어내는 이상(1910~1937)의 압도적인 모습에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이상을 빼고 우리 문학사를 논할 수가 없듯이 구본웅을 빼고서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말하기가 힘들다. 두 천재는 서촌 배화여고 자리에 있었던 신명학교 동기다. 나이는 구본웅이 네 살 더 많으나 몸이 쇠약해 학교를 쉬어가며 다녔기에 이상과 졸업을 같이 하게 됐다. 신명학교 시절, 구본웅은 글씨를 잘 썼고 이상은 말을 잘했다.

구본웅의 집안은 예사롭지가 않다. 그의 부친은 4형제 중에서 셋째였다. 첫째는 군수를 지냈고 둘째는 대한제국 최초의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서 공부했다. 나중에 진명여고 교장을 했다. 셋째 구자혁(1885~1959)은 경남 창원우체사에서 관리로 일하다 전라도 옥구로 발령을 받은 후 곧바로 사표를 내고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 전문부를 다녔다. 러일전쟁 전후의 일이다. 넷째 구자옥은 미국 스프링필드대에서 유학한 엘리트다. YMCA에서 총무로 일했고 해방 후 초대 경기지사를 지냈다. 구자혁은 적수공권으로 1만2000석 규모의 큰 재산을 모았다. 자식이라곤 구본웅이 유일했다. 불행히도 구본웅은 곱추였다.


한국전쟁이 났다. 구본웅을 잘 아는 육군 대령이 구본웅의 큰아들에게 연락했다. 구본웅은 큰아들 그리고 몇 명의 친구들과 함께 대령이 주선한 배를 타고 인천에서 마산으로 갔다. 대령은 그들을 배려했다. 그러나 일행 전체가 신세를 지기에는 무리였다. 구본웅만 마산에 남았다. 금수저 출신의 구본웅이었지만 돈을 벌어야 했다. 구본웅은 춘화를 그려 미군들에게 팔았다. 어릴 때부터 서예에 능했던 구본웅은 모필에 익숙했다. 빠른 필속의 동양화풍의 운필이 춘화와 잘 맞아떨어졌다. 제법 팔렸다. 그 돈으로 숙식을 해결해가며 몇 달간 마산 무학산 언덕에서 지냈다. 그 사이 수원의 집은 폭격을 맞아 산산조각이 났다. 그림도 골동품도 다 사라졌다. 피란 중에도 둘둘 말아서 애지중지 들고 다닌 그림들이 있었다. 그 하나가 ‘친구의 초상’이다. 1952년, 구본웅이 죽고서 그림 한장이 펼쳐졌다. 그림을 본 구자혁이 ‘해경이네’라고 신음하듯 외쳤다. 김해경은 이상의 본명이다. 얼마 남지 않은 구본웅의 그림은 여기저기에 흩어져 사는 가족들의 집에 산재했다. 1954년 천일화랑에서 김중현, 구본웅, 이인성 ‘유작삼인전’을 할 때 비로소 먼지를 털고 한군데에 모여 모습을 드러내었다.


구본웅은 작은 몸으로 큰 세상을 품었다. 그의 집안은 원래 무인 혈통으로 골격이 컸다. 큰 몸짓으로 큰 세상을 품는 발레리나 강수진이 구본웅의 외손녀다.


황인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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