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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 (水原華城)-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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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14회 작성일 23-10-14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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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은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오른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성곽으로, 조선시대 성곽건축의 꽃이다. 

화성은 18세기말에 세워진 대표적인 성곽도시이자 신도시이다. 효는 이 도시를 지배하는 정신적인 기둥이었다. 

신도시 건설 자체가 부친 사도세자의 묘소를 조선 최고의 길지로 옮기려는 정조의 효성에서 시작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을묘년(1795년)에는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연을 축성공사가 한창이던 화성에서 성대하게 거행한 것도 효의 실천 그 자체였다. 용주사를 지어 부친의 묘소를 지키도록 한 일이나 부모의 은혜를 주제로한 <부모은중경>을 이 절에서 간행토록 한 것 모두 효의 본보기였다.

ㅡ김동욱의 <실학정신으로 세운 조선의 신도시 수원화성>


수원화성은 1794년 정월에 터닦기를 시작하여 1796년 9월에 완공되었으며 전체 성벽길이가 5.4km이다.

1789년 수원고을 244호의 주민들은  화산아래에 위치한  당시 살던 곳(수원 구읍)을 떠나 북으로 10리 떨어진 팔달산 아래 (수원신읍) 으로 이사를 가라는 명을 받았다.

그 이유는 화산 아래 구읍지역이 천하의 길지로써, 사도세자의 묘소를 이곳에 이장하기 위해서였다. 원래의 영우원에서 이곳으로 이장한 묘소는 정조때 헌륭원으로 불리웠고 고종때 융릉으로 바뀌었다.

당시 인구파악을 위해 주민들의 이름을 문서에 올렸는데, 당시 서민들의 이름이 작은 놈, 큰놈, 개똥이, 돌쇠와 같은 이름들이 많았으며 문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崔者斤老味,安大老味, 金介同,

高乭金, 李於仁老味 등ᆢ.

1790년(정조14년) 5월 관청이 완성되고 총주민 719호의 집들이 들어선 신도시가 새롭게 탄생하였다. 화성 신도시는, 기존의 다른 고을들이 대부분 남향인 것과는 달리, 팔달산을 배경으로 동향으로 자리 잡았다. 관청이 모두 동향으로 자리하고, 간선도로는 관청과 직각방향인 남북방향으로 놓였다.

화성신도시 건설의 직접적인 계기는 정조의 부친 사도세자의 묘소를 옛수원고을 뒷산으로 옮기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여기에 덧붙여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강력한 신하들의 파당정치는, 영조로 하여금 자기의 자식을 뒤주에 가두어 죽이게 만들었다. 42살의 나이에 늦동이 아들을 얻고서 그렇게도 기뻐했던 왕이였었는데ᆢ.

신하들의 끊임없는 방해를 물리치고 어렵게 왕위에 오른 정조는 강력한 왕권확립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노론이 지배하던 정치구도를 남인 또는 소론인사들을 등용하는 탕평책을 통해 해소코자 하였고, 신진학자들을 대거 규장각에 모아 학문을 일으킨 것들은 정조의 큰 업적중 하나이다.

정조가 화성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왕의 거처와 집무를 위한 행궁을 건설한 것은 지금으로 보면 세종행정시와 맥이 같다고 본다. 당시 화성천도설이 돌았으나 근거없는 추측으로 밝혀졌다. 화성신도시 건설후 5년이 지나 화성성곽이 완성되었는데, 한나라의 도성의 규모로는 지나치게 작았다.

정조의 의도는 세자(순조)가 15세가 되는 1804년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이 되어 어머니 혜경궁을 모시고 화성에 머물며, 신왕의 든든한 배경이 되고자 했다는 것이 설득력이 있어보인다. 그러나 1800년 정조는 49세의 한창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그의 모든 계획은 무산되었다. (1752~1800, 재위 1776~1800)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는 15살에  66살의 영조에게 왕비로 간택되었다. 사도세자보다 10살 아래이며 사도세자의 죽음에 영향을 주었다고도 한다. 정조가 죽은 후 어린 순조를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함으로써, 정조가 다져놓은 왕권을 무력화 시키고, 이때로 부터 조선의 국운이 쇠퇴기로 들어가게 된다.

정조에 의해 중용되었으며, 수원화성 건설의 중책을 맡았던 정약용은, 정조 사후 끈떨어진 연이 되어, 1801년 신유박해 때 천주교도 탄압의 주대상자가 되어 유배를 간다. 그의 셋째형 정약종은 사형을 당하고, 둘째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를 가서  '자산어보'를 쓰고 그곳에서 죽는다. 정약용 자신도 18년의 유배생활을 하게 되고 고향으로 낙향하게 된다.


ㅡ김준혁의 '화성' 및 김동욱의 '조선의 신도시 화성' 부분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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