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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 (水原華城)-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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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60회 작성일 23-10-14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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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자신의 꿈과 이상이 담긴 신도시 화성을 만드는데 과학문명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였다. 

화성을 견고하게 축성하고, 백성들의 노역을 줄이기 위해 젊은 학자 정약용을 중용하여 그에게 화성축성의 기본 설계를 맡겼다. 

과학기술 능력과 실무능력을 가지고 있는 정약용은 정조가 한강을 건널 때 이용했던 배다리설계와 시공을 했었다.


정약용은 청나라에서 들어온 '기기도설'의 책을 참조하여 '거중기'를 만들었는데, 도르래를 이용해 돌같은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릴 수 있는 장치이다. 

이 거중기 및 활차 등의 이용으로 무려 7년의 시간이 절약되고 비용도 훨씬 절약되었다 한다. 


성곽 축성당시 31세로 홍문관의 젊은 실학자였던, 다산은 정조의 전폭적인 신임하에 성곽규모를 적절한 수준으로 축소하고, 성곽에 촘촘한 방어시설을 설계, 시공하여 2년 8개월의 짧은 기간에 성곽건설을  완성한다.


다산은 75세에 세상을 떠났는데(1762~1836), 숫자 18과 묘하게 관계가 깊다. 관직에 나가 정조와 함께 국정운영에 참여한 햇수가 18년(1783~1800), 정조사후 유배를 산 햇수가 18년 (1801~1818), 고향에 돌아와 학문을 하다가 세상을 떠날때까지의 햇수가 18년 (1819~1836)이다.


다산의 대표저서로 '1표2서'라 불리는 '경세지표, 목민심서, 흠흥신서'가 모두 다산의 유배생활 이후에 저술되었다. 역설적으로, 그가 유배를 갔기에 후세에 귀감이 되는 그의 사상이 저서로 완성되어 후대에 전하게 된 것이다.


화성의 성곽은 서쪽의 팔달산 정상에서 각각 남북쪽 산등성이를 타고 평지로 내려와, 다시 동쪽의 낮은 구릉으로 이어지면서 불규칙한 형태를 이룬다. 성벽에 설치된 방어시설물들은:--- 

성문4, 장대2, 암문5, 수문2, 적대4, 공심돈3, 각루4, 기타 포루, 포사, 치등 방어와 공격시설물들이 성벽을 따라 늘어서 있다.


대(臺):높은 위치에서 적을 감시

돈(墩):주변감시, 공격시설

장대(將臺):군사지휘대, 훈련장

각루(角樓):성곽의 감시시설

포루(砲樓):공격용 군사시설

암문(暗門):비상시 출입문


화성을 대표하는 건축물들은 다음과 같다.

장안문 및 팔달문, 화홍문과 방화수류정, 서장대와 동장대,  공심돈과 봉돈(봉화돈) 등.


수원화성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많은 부분이 파손되었으나, 축조당시의 기록인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하여 1975년부터 보수 및 복원공사를 시작하였다. 건물복원, 무너진 곳 보수, 주변정리사업의 3기본지침에 따라 화성은 옛모습을 거의 회복하였다. 단 팔달문주변의 성곽은 이미 들어서있는 남문시장으로 인해 복원되지 못했다.   


심하게 파손된 유적지의 건축물은 보수 및 복원된다 하여도, 유네스코에서 문화유산으로 인정받지 못하나, 수원화성은 세계기록유산인 '화성성역의궤' 의 설계도면에 따라 보수, 복원되었기에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화성행궁 역시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민족문화및 역사말살정책에 의해 정조가 특별과거시험과 양로연을 열었던 낙남헌(洛南軒)을 제외하고는 모든 시설들이 헐려버렸다. 1996년 1단계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2003년에 일반에게 공개되었으며 아직도 복원공사가 진행중이다.


*정조의 수원화성 행차*

1일: 왕과 혜경궁을 모신 가마가 창경궁을 나섰다. 관복을 입은 군사들, 깃발을 든 말탄 군인들, 왕의 가마, 말을 탄 상궁들, 혜경궁의 가마의 긴 행렬이 한강에 설치된 배다리를 건너 노량진의 용양봉 저정에 머물러 점심과 휴식후 시흥행궁에서 첫날을 묵었다.

2일:비가 내리는 가운데 화성도착. 혜경궁은 장락당에 정조는 유여택에 머뭄.

3일:왕은 화성향교의 대성전 참배

4일:왕은 혜경궁과 함께 현륭원에 전배

5일:봉수당에서 회갑연. 정조는 어머니의 복록장수를 비는 시를 지음.

6일:백성들에게 쌀을 내려주는 시미의식을 행하고 낙남헌에서 양로연을 베품. 왕은 득중전에 나가 활쏘기를 하여 30발중 24발 명중.

7일:귀궁. 화성을 떠난후 시흥행궁에서 하루 묵음.

8일: 시흥을 떠나 노량진 용양봉 저정에서 점심후 배다리를 건너 숭례문을 거쳐 창덕궁에 도착함. 행렬에 참여한 인원은 거의 6,000명에 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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