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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현성당과 종현성당 (현 명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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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75회 작성일 23-10-28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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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천주교회인 중림동의 약현성당과 종현성당 (현 명동성당). 


약현성당은 종현성당과 시작은 거의 같이 했는데, 여기저기에서 가해오는 각종 음해와 훼방에 대응하느라 1898년 5월 29일에야 완공한 종현성당보다 몇년 빠른 1893년 9월 25일에 완공하였기에 국내 최초가 되었다. 


1882년의 한미수호 조약과 1886년의 한불수호 조약으로 천주교의 자유가 허락되자 서울의 천주교 신자 수가 크게 증가하였다. 교단은 천주교 박해 때에 44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서소문(西小門) 밖에서 순교한 것을 기리고자 순교지가 내려다 보이는 현재 중림동의 언덕위에 임시 성당을 짓고 미사를 진행했다. 


이 성당의 이름이 약현성당이었는데, 성당이 위치한 언덕의 이름이 약초를 재배하던 서대문 밖 약현(藥峴)이었던 데서 유래되었다. 그 후 본격적으로 성당 건물을 짓기 위하여 부근의 땅을 구입하였다. 


1887년 전후에 구입한 대지에 1891년 10월 27일 성당 건축의 정초식(定礎式)이 거행되었다. 그리고는 1893년 9월 25일 선교사와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의 최초 서양식 성당 강복식(降福式)이 거행되었다. 


한편, 조선교구를 대표하고 관장할 주교좌성당을 짓고자 교단은 1795년에 명례방 사건이 있었던 장소의 대지를 매입하기 시작하였다. 재정지원은 파리선교회가 하였다. 당시 그자리에는 명문가의 커다란 한옥이 있었는데 바깥채만도 60칸이 넘는 넓은 집이어서 처음에는 한옥 그대로를 교회로 이용했다 한다. 


교단은 이 곳을 우선 성당으로 꾸며 미사를 집전하는 한편 본격적인 성당 건립을 추진해 1887년 (고종 24)에 부근의 대지를 마저 구입하면서 정지 작업을 시작했다. (종현은 명동성당이 세워진 장소의 원래 지명을 말한다. 정유재란 때 명나라 장군 양호가 이곳에 진을 치고 큰 종을 가져다 달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당시 고종은 수백년 도성안에서 궁궐보다 높은 언덕배기에 여태껏 듣도 보도 못하던 엄청나게 크고 높은 서양식 건물을 짓는 것은 왕실을 우롱하는 무엄한 행태라고 크게 분개하며 토지 소유권등에 시비를 거는등 벼라별 수단을 모조리 동원하여 방해공작을 벌이며 건축을 막고자 했다. 


어쨌던 토지 소유권 분쟁이 일단락되어 1892년 8월 5일 기공식을 하여 이런저런 훼방과 난관을 극복해가며 어렵사리 공사를 이어간 보람이 있어, 드디어 1898년 5월 29일 성당은 완성되어 역사적인 축성식을 가졌다. 당시의 이름은 종현성당(鐘峴聖堂)이었다. 


1924년에는 파이프오르간이 수입되어 처음으로 성당 내에 설치되었다. 현재 이 오르간은 소실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이름을 명동성당으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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