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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列國誌] 2부 장강의 영웅들 (298) 제38장 구천의 와신상담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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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62회 작성일 23-02-19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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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장 구천의 와신상담 (5)

 

BC 491(오왕 부차 5, 월왕 구천 6), 구천(句踐)은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고국 월()나라를 향해 출발했다. 오나라로 잡혀가 부차의 종복 생활을 한 지 만 3년 만의 귀국이었다.

오나라 수도 오성(吳城)에서 월나라 수도 제기(諸曁) 사이에는 수백개의 강이 흐르고 있다. 수로가 아니면 서로 내왕할 수 없을 정도다. 한마디로 물의 나라였다.

그 중 대표적인 강이 오송강, 전당강, 부춘강이었다.

이들 세 강은 종으로 횡으로 수백 개의 지류를 형성하면서 오()와 월()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었다.

월왕 구천(句踐)은 오성을 나와 육로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오늘날 회계만으로 흘러드는 부춘강가에 섰다. 하늘은 높고 밝았으며, 강은 깊고 맑았다. 이제 이 강을 건너 그 지류인 포양강(浦陽江)을 따라 내려가면 도읍인 제기(諸曁).

구천(句踐)은 강 건너 아름다운 고국 산천을 바라보았다.

감개무량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기쁨의 탄성을 내질렀다.

"내가 지난날 이 곳을 떠날 때는 다시는 월()나라 땅을 밟지 못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이렇듯 이 산천을 보게 될 줄이야!"

구천(句踐) 부부는 범려의 안내를 받아 배에 올랐다.

돛이 오르고 배가 강심을 향해 미끄러져 내려갔다. 부춘강을 건너 포양강을 거슬러올라갔다. 포양강 나루에는 이미 문종을 비롯한 월()나라 신하들과 백성들이 대거 영접 나와 있었다.

배가 당도했을 때 돌아오는 사람과 마중 나온 사람들은 서로 부둥켜 안고 눈물 바다를 이루었다. 백성들은 환호성을 질러 천지가 흔들릴 지경이었다.

그동안 구천을 대신하여 월나라를 다스린 문종(文種)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그동안 얼마나 고초가 많으셨습니까. 왕께서는 결코 회계산의 치욕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제부터 모든 것이 다시 시작입니다."

구천(句踐)도 문종의 손을 부여잡고 대답했다.

"회계산의 치욕을 내 어찌 꿈속에서인들 잊으리오. 내가 오늘날 살아 돌아온 것은 하늘이 내게 원수를 갚게 하려 함이오."

그러고는 천문에 밝은 범려를 돌아다보며 말했다.

"내가 언제 입성하면 좋을지 점을 쳐보시오."

범려(范蠡)는 즉석에서 시초 점을 쳐보았다.

범려가 사()를 보고 나서 대답했다.

"내일 입성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서둘러 수레를 달리십시오."

감격의 시간이 지나자 구천(句踐)은 곧 수레에 올랐다.

포양강 나루에서 도성인 제기(諸曁)까지는 육로로 꼬박 하룻길이기 때문이었다. 구천의 수레는 백성들의 환호성을 뚫고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일행은 밤새도록 달렸다.

수레는 다음날 정오 무렵에 제기에 당도했다. 도성 안으로 들어선 구천(句踐)은 가장 먼저 종묘로 달려가 자신의 귀환을 고하였다. 그러고는 궁으로 들어가 왕좌(王座)에 올랐다. 월나라는 방방곡곡 기쁨에 넘쳤다.

구천(句踐)은 조정 신료들에게 명했다.

귀국 후 첫 일성이었다.

- 도읍을 옮기리라!

그는 3년 전 회계산에서 오왕 부차에게 무릎 꿇고 항서(降書)를 바친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도읍을 회계(會稽)로 옮겨 그 날의 굴욕을 잊지 않으리라 결심했던 것이다.

성 쌓는 일은 범려가 맡았다.

범려(范蠡)는 회계 땅으로 달려가 천문을 보고 지리를 살핀 후 회계산 주변으로 큰 성을 쌓기 시작했다. 이것이 곧 월나라의 새도읍인 회계성(會稽城)이다.

그는 또 회계성 서북쪽의 와룡산에 비익루(飛翼樓)를 세우고는 그 곳으로 들어가는 문을 '천문(天門)'이라 이름하였다. 하늘로 통하는 문이라는 뜻이다. 동남쪽에는 하수구를 내어 지호(地戶)를 상징케하는 한편 크고 견고한 성곽을 쌓았다. 하지만 비익루가 있는 와룡산에는 일절 성벽을 쌓지 않았다.

범려(范蠡)는 군사들을 시켜 와룡산에 성벽을 쌓지 않은 이유를 널리 퍼뜨리게 했다.

- 우리는 오()나라를 섬기는 나라다. 서북쪽에 성벽을 쌓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일 뿐 아니라 오나라로 공물을 보내는 데 몹시 불편하다. 하늘로 통하는 문에 어찌 벽을 쌓을 것인가.

이 소문은 오나라 세작들을 통해 오왕 부차의 귀에도 전해졌다.

부차(夫差)는 구천의 행동을 감시하고 있다가 이 같은 소문에 접하자 매우 만족했다.

- 과연 구천은 나를 섬기는 마음이 시종여일(始終如一)하구나.

그러나 범려(范蠡)가 와룡산에 성벽을 쌓지 않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후일 오()나라를 칠 때 방해되지 않도록 미리 길을 닦아놓은 것이었다.

회계성(會稽城)이 완공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겨났다. 어느 날 아침, 사람들이 잠에서 께어나보니 회계성 뒤편에 난데없이 산 하나가 솟아 있었다. 주위 둘레만도 수십 리가 되는 산이었다.

그 모양은 마치 거북이 엎드리고 있는 것 같았다. 초목도 무성했다. 회계성(會稽城)을 쌓으며 나온 흙무더기에 나무를 심은 것이겠으나 당시 사람들에게는 여간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과장되이 말했다.

"이 산은 제나라 낭야 땅에 있는 동무산(東武山)이 아닌가. 어찌 하룻밤 사이에 동무산이 이 곳으로 날아왔는지 모르겠도다!"

범려는 본래 제()나라 사람이다.

자신의 뜻을 펴기 위해 이곳 저곳 유랑하다가 남쪽 월()나라에 와서 정착하여 관직에 올랐다. 그러므로 그가 고향 땅에서 자주 본 동무산의 형상을 그 곳에 재현시키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동무산(東武山)을 본떠 만든 그 산이 떠벌리기 좋아하는 사람들에 의해 '산이 날아온 것'으로 소문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또 그것은 범려(范蠡)가 노린 바이기도 했다.

그는 월왕 구천(句踐)에게 그 소문을 고했다.

"신이 성을 준공하자 하늘이 이에 응하여 난데없이 산을 솟게 하였습니다. 이는 우리 월()나라가 장차 천하 패권을 잡을 징조입니다."

구천은 기뻐하며 그 산을 괴산(怪山)이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은 그 산을 비래산(飛來山), 혹은 구산(龜山)이라고 불렀다.

범려(范蠡)는 다시 비래산 위에 영대(靈臺)라는 대()를 세우고 그 위에 3층 누각을 지어 마치 신령스런 짐승이 오나라를 노리고 있는 듯하게 꾸몄다. 이렇듯 그는 회계성의 모든 것을 철저하게 오()나라와 연관시켜 꾸몄다.

 

38장 구천의 와신상담 (6)

 

성곽과 도로와 궁성이 갖추어지자 월왕 구천(句踐)은 제기 땅을 떠나 회계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회계성(會稽城)은 화려하지 않았으나 몹시 견고했다.

구천(句踐)은 만족하여 궁성을 둘러본 후 범려를 치하했다.

"경이 없었더라면 과인은 지금까지도 오()나라에서 말똥을 치우고 있었을 것이오. 진실로 내가 돌아온 것은 그대 덕분이오."

구천(句踐)은 내전으로 들어갔다.

자신이 잠자는 방 안의 구조가 눈에 익었다. 왕의 침실이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고 옹색했다. 영문을 알지 못한 구천이 범려를 돌아보았다.

범려(范蠡)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왕께서는 지난날 호구산 석실에서 고생하시던 때를 잊지 마시고 부디 월()나라를 재건하여 오나라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십시오."

구천(句踐)은 범려의 뜻을 알았다. 그의 손을 움켜잡고 대답한다.

"과인은 오로지 경()의 가르침에 따를 뿐이오."

이 날부터 월왕 구천의 고난스런 생활은 다시 시작되었다.

그는 오()나라에 원수를 갚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 가혹하게 다뤘다. 그는 자정이 넘을 때까지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잠이 오면 송곳으로 무릎을 찔렀다. 겨울에 발이 시리면 오히려 찬물을 가져다 발을 담그고 자신을 꾸짖었다.

- 구천아, 구천아. 너는 오()나라에서 당한 굴욕을 잊었느냐.

여름이면 방 안에 화로를 갖다놓고, 겨울이면 얼음을 품속에 끼었다. 또 그는 침상 위에 푹신한 보료를 깔아놓는 대신 섶나무를 깔아 그 위에 누웠다.

날카로운 나뭇가지가 온몸을 쑤셔댔다.

등이 배겨 견딜 수 없으면 스스로를 또 심하게 질책했다.

- 구천아, 구천아. 네가 호구산 석실에서 잘 때 이보다 편했느냐!

침상 위애는 곰 쓸개를 매달아놓았다.

쓸개는 몹시 쓰다.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혀를 댈 수 없을 정도다.

그런데도 구천(句踐)은 섶나무 침상에 눕기전에 한 번, 일어날 때 한 번 그 쓸개를 핥았다. 도저히 써서 핥기가 고통스러울 때는 고개를 쳐들어 자신을 향해 꾸짖엇다.

- 구천아, 구천아. 네가 핥은 부차의 똥 맛을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말이 있다.

와신(臥薪) '섶나무 위에 눕다' 라는 뜻이다.

상담(嘗膽) '쓸개를 맛보다' 라는 뜻이다.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어떠한 고난도 감내한다는 뜻의 이 말은 이렇게 해서 생겨났다.

구천(句踐)은 잠자다 말고 벌떡 일어나 때로는 소리없이 흐느껴 울기도 하고, 때로는 이를 갈며 자신의 결의를 다지기도 했다. 그가 어찌나 빠드득 이를 갈았는지 구천의 이는 모두 으스러졌다고 한다.

월왕 구천(句踐)은 자신에게만 엄격했던 것은 아니다.

나라의 신료들과 백성들에 대해서도 엄한 법령을 적용했다. 춘추시대를 기록한 또 하나의 귀중한 자료인 <국어(國語)>를 보면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젊은 남자는 늙은 여자를 아내로 삼지 못하게 했다.

늙은 남자는 젊은 여자를 아내로 삼지 못하게 했다. 튼튼하고 씩씩한 아들을 낳게 하기 위해서다.

또한 여자가 열일곱 살이 넘었는데도 결혼하지 않는다던가, 남자가 스무 살이 되었는데도 결혼하지 않으면 당사자는 물론 그 부모까지 처벌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여자는 스무 살에 시집을 가고, 남자는 서른 살에 장가가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구천(句踐)은 인구를 증가시키기 위해 이 관례를 깨고 조혼(早婚)을 강요한 것이었다.

인구를 늘리기 위한 정책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계속해서 <국어(國語)>는 기록하고 있다.

여자는 해산이 임박하면 관가에 신고해야 했고, 관가에서는 의원을 파견하여 애를 낳는 데 지장이 없도록 돌봐주었다. 그리하여 아들을 낳으면 산모에게 술 한 병과 개 한 마리를 잡아주고, 여자아이를 낳으면 술 한 병에 돼지 한 마리를 주어 산모를 보양시켜 주었다.

세 쌍둥이를 낳으면 나라에서 유모를 보내주었고 쌍둥이를 낳으면 양식을 보태주었다. 적자(嫡子)가 죽으면 그 집은 3년 동안 부역을 면제해주었고, 서자(庶子)가 죽으면 석 달 동안 부역을 면제해주었다.

법령만 엄격하게 편 것은 아니었다.

구천(句踐)은 애정과 사랑과 인의로써 백성들을 잘 보살폈다.

사람이 죽으면 친히 그 집에 행차하여 조문하고 슬퍼하기를 마치 친아들처럼 했다. 고아, 과부, 병자, 빈약자의 자식들을 관청으로 불러들여 가르치고 먹여주었다.

뛰어난 사인(士人)들에게는 깨끗한 거처를 마련해주고, 훌륭한 의복을 주고, 음식을 넉넉히 제공해 마음놓고 도의(道義)를 갈고 닦을 수 있게 했다.

궁성 밖으로 나갈 때는 수레 뒤에다 음식을 실어 거리에서 만나는 젊은이들에게 나눠주며 반드시 그 이름을 물어보았다.

농사 때가 되면 친히 들에 나가 밭을 갈았다.

월부인(越夫人) 또한 늘 베틀에 앉아 베를 짰다. 구천 부부는 언제나 백성들과 함께했다. 자신이 몸소 심은 것이 아니면 먹지 않고, 직접 짠 옷이 아니면 입지 않았다.

이렇게 7년 동안 구천(句踐)은 와신상담을 하였고, 백성들에게 세금을 걷지 않았고, 고기를 먹지 않았다.

이에 맞추어 문종(文種)은 나라 살림을 다스리고, 범려(范蠡)는 군대 양성에 온 힘을 쏟았다.

구천(句踐)은 오왕 부차에 대해서도 지극히 충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이는 오나라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한 술책이었다.

그는 한 달에 한 번씩 오()나라로 사자를 보내어 부차에게 문안 인사를 올렸다. 그때마다 월나라에서 나는 특산품을 수레 가득히 실려보냈다.

오왕 부차(夫差)는 이러한 구천의 지극한 충성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지난날 빼앗은 월 땅을 도로 구천에게 돌려주었다. 이리하여 월()나라는 동으로는 은(), 서로는 고멸(姑蔑), 남으로는 구무(句无)에 이르고, 북으로는 어아(禦兒) 땅에 이르러 사방 8백 리의 지역을 다스리게 되었다.

구천(句踐)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대나무로 만든 배 10척과 갈포(葛布) 10만 필, 1백 병, 호피(虎皮) 5쌍을 부차에게 바쳤다.

"착하구나, 구천이여!"

부차(夫差)는 너무나 기뻐 구천에게 의관을 우모(羽毛)로 장식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우모로 장식한 의관은 제후만이 착용할 수 있다.

그 무렵, 오나라 조정의 실권은 오자서에서 백비에게로 옮겨가 있었다. 월왕 구천의 귀국 문제로 인해 오자서(伍子胥)는 부차와 사이가 멀어졌고, 대신 백비가 총애를 한몸에 받게 되었던 것이다.

날이 갈수록 월나라에 대해 부차의 인정이 관대해지자 오자서(伍子胥)는 아예 병들었다 핑계하고 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신나는 것은 태재 백비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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