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권 오월춘추 제39장 미인 서시(西施) (1)~(2)
페이지 정보

본문
제39장 미인 서시(西施) (1)
오나라가 월나라를 치고, 월왕 구천(句踐)이 오나라로 잡혀가 굴욕적인 종복 노릇을 하고, 그 후 귀국하여 오나라에 대한 복수를 위해 와신상담하고 있을 그 시기는 공자(孔子)가 한창 천하를 역유(歷遊)하고
다닐 무렵이었다.
일찍이 공자가 제자 자로(子路)에게
밝혔듯이 그의 천하 역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 나를 써주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곳으로 가 동주(東周)를 이루리라.
자신의 정치 사상을 알아주고 펼칠 수만 있다면 그는 어느 나라든 상관하지 않고 달려갈 작정이었다. 이것은 망명과는 성격이 달랐다. 좀더 쉽게 말하면 벼슬자리를 구하러
다닌 것이다.
그러나 공자(孔子)는
그 어느 곳에서도 정착하지 못했다.
그의 천하 역유(歷遊)는
본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상황이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그가 지니고 있는 사상, 인의와 예를 바탕으로 한 정치 형태는 존망이 걸린 당시 나라들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제후들의 관심은 오로지 어떻게 하면 전쟁에서 이기느냐 하는 것뿐이었다.
그의 천하 역유(歷遊)는 13년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공자가 노(魯)나라를
떠나 가장 먼저 방문한 나라는 위(衛)나라였다. 그는 그 곳에서 자로의 처형인 안탁추(顔濁鄒)라는 사람의 집에서 머물렀다.
당시 위나라 군주는 위영공(衛靈公).
위영공(衛靈公)은
공자의 방문을 받고 매우 기뻐했다.
만나자마자 이렇게 물었다.
- 선생이여, 진(陳)을 치고 적을 무찌르는 법을 가르쳐주십시오.
- 저는 아직 진 치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공자(孔子)는 실망했다.
열 달을 머문 후 위(衛)나라를
떠났다. 그러나 미련이 남았던 모양이다. 국경 근처에 이르렀다가
다시 위나라 도성으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현자로 소문난 거백옥(蘧伯玉)의 집에 머물며 그와 사귀었다.
이때 위영공의 부인은 남자(男子)라는 여인이었다.
송나라 공녀 출신으로 용모가 매우 뛰어났다. 그러나 그녀는 몹시
음탕했다. 시집오기 전 송나라 공자 조(朝)와 불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런 중에 위영공에게 시집온 것이다.
남자는 위영공의 아들 괴귀(蒯瞶)를 낳았다.
괴귀는 장성하여 위나라의 세자가 되었다. 그러나 남자는 송나라
공자 조(朝)를 잊지 못했다.
이 무렵 위(衛)나라에도
한 미남자가 있었다. 이름을 미자하(彌子瑕)라 했다. 그런데 미자하는 남색가(男色家)였다. 위영공도 여색보다는 남색을 즐겨했다. 그는 아름다운 청년 미자하를 자신의 남색 상대로 삼았다.
두 사람은 노골적으로 애정을 표현했다.
하루는 여러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미자하(彌子瑕)가 복숭아를 먹다 말고 위영공의 입 안에다 넣어주었다.
위영공(衛靈公)은
그런 미자하가 너무나 사랑스러워 반조각 복숭아를 맛있게 먹으며 자랑했다.
- 미자하(彌子瑕)는 나를 너무나 극진히 위하는구나. 맛있는 복숭아를 차마 혼자 먹지
못하고 과인의 입에 그 반을 넣어주었도다.
이 광경을 목격한 신하들은 외면하고 소리 없이 웃었다.
위영공(衛靈公)은
밤마다 미자하를 데리고 자면서도 부인인 남자(男子)를 몹시
두려워했다.
미자하(彌子瑕)가
속삭였다.
- 군부인에게도 애인을 만들어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좋은 계책이다.
며칠 후, 위영공(衛靈公)은 송나라로 사람을 보내 남자의 옛 연인인 공자 조(朝)를 위나라로 불러들였다. 마침내 남자(男子)는 그리고 그리던 연인 공자 조와 해후하여 그간의 정열을 쏟아냈다.
이에 위영공(衛靈公)은
미자하와 붙어 지내고, 그 부인 남자(男子)는 옛 애인인 송공자 조(朝)와
엉켜 지냈다. 어느덧 위나라 백성들 사이에는 그들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졌다.
세자 괴귀(蒯瞶)는 어머니에 관한
추잡한 소문 때문에 낯이 뜨거워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심복 부하 희양속(戱陽速)을 불러 비밀리에 지령을 내렸다.
- 기회를 보아 나의 생모를 살해하라.
그러나 이 지령이 사전에 남자의 귀에 들어갔다.
남자(男子)는 놀라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여 위영공에게 하소연했다.
- 자식이 어미를 죽이려 하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위영공 또한 분노하여 세자 괴귀(蒯瞶)를 나라 밖으로 추방한 후 손자이자 괴귀의 아들인 공손첩(公孫輒)을 세손으로 세웠다.
이럴 때 공자(孔子)가
다시 위나라 도성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위영공의 부인 남자(男子)는
자신의 음탕함을 감추기 위해 공자를 맞아들여 공경히 대접했다.
어느 날, 위영공(衛靈公)이 부인과 함께 수레를 타고 나들이를 나갔다.
공자를 불러 그 뒤를 따르게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위나라 도성
사람들이 노래를 불렀다.
수레에 함께 탄 것은 색(色)이고
수레 뒤를 따르는 것은 덕(德)이로구나.
색(色)을 좋아하는
부인은 수레 옆에 태우고 인(仁)과 예(禮)를 펼치는 공자는 그 뒤를 따르게 한 위영공의 처사를 조롱하는
노래였다.
공자(孔子)는 그
노래를 듣고 홀연 깨우쳤다.
- 그렇구나. 위나라
임금은 덕보다 색(色)을 더 좋아하는구나.
공자는 더 이상 위나라에서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없음을 알고 다시 그곳을 떠나 송(宋)나라로 들어갔다.
하지만 송나라 군주 송경공(宋景公)도 남색에 빠져 있었다.
그의 상대는 사마 환퇴(桓魋)였다. 환퇴는 공자가 송나라로 들어오게 되면 자신의 입지가 불리하다는 것을 깨닫고 가신(家臣)을 불러 명했다.
- 공자(孔子)가 지금 도성 밖 커다란 나무 밑에서 강론을 펼치고 있다. 너는 그
곳으로 가 나무를 베어버리고 공자를 잡아죽여라.
그러나 공자는 그 소식을 미리 듣고 얼른 송(宋)나라를 떠났다.
이번에는 정(鄭)나라로
갔다.
그러나 정애공(鄭哀公) 역시
폭정을 펼치며 군사 부문에만 관심이 있을 뿐 공자의 말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았다. 더욱이 그 곳에서
공자(孔子)는 심한 모욕을 당하기도 했다.
- 상갓집 개가 왔다.
정나라 사람들은 이렇게 조롱했다.
이곳 저곳 떠돌아다니며 관직을 구하는 공자에 대한 비웃음이었다.
- 여기도 내가 있을 곳이 못 되는구나.
실망한 공자(孔子)는
정나라를 떠나 진(晉)나라로 향했다.
제39장 미인 서시(西施) (2)
공자(孔子)가 정나라를
떠나 황하가에 이르렀을 때였다.
그 무렵 진(晉)나라에서는
집정 대신 조앙(趙鞅)이 자신의 동료 대신인 두명독(竇鳴犢)과 순화(舜華)를 죽인 사건이 발생했다.
그 소문을 들은 공자(孔子)는
발길을 멈추고 탄식했다.
- 아름답구나 황하여, 넓고도
넓구나. 내가 이 황하를 건너지 못하는 것 또한 운명이로다.
자공(子貢)이 달려나와
물었다.
- 지금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 두명독과 순화는 진(晉)나라의 어진 사람이다. 조간자(趙簡子, 조앙)가 아직 뜻을 얻지 못했을 때 그는 이 두 사람의 도움을 받아
뜻을 이루었다. 그런데 어찌 그들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새나
짐승도 같은 동류를 죽이지 않거늘, 하물며 사람이야!
공자(孔子)는 황하를
건너는 것을 단념하고 발길을 돌렸다.
그래도 위(衛)나라가
가장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음인가. 그는 다시 위나라로 들어갔다.
그런데 공자(孔子)는
운도 나빴다.
그가 위나라로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위영공이 죽은 것이다. 위나라
대부들은 세손 공손첩(公孫輒)을 군위에 올렸다.
그가 위출공(衛出公)이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 괴귀가 살아 있었다.
괴귀는 진(晉)나라에
망명해 있었는데, 그때까지도 그는 군위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는 진(晉)나라에
도움을 요청해 놓고 귀국할 기회만 엿보았다.
반면, 아버지를 제치고 먼저 임금자리에 오른 위출공은 위출공대로
임금자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제(齊)나라에 도움을 청하여
아버지의 귀국을 저지했다. 이런 환경 아래서 위출공(衛出公)이 공자의 사상에 관심을 가질 리 없었다.
공자(孔子)는 실망하고
다시 위나라를 떠났다.
진(陳)나라로 들어갔다. 진나라에서는 그래도 오래 머문 편이었다. 수 년을 그 곳에서 체류한
공자와 제자들은 다시 여행길에 올랐다.
이번에는 채(蔡)나라를
바라보고 걸었다.
채나라에서는 그리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가 다시 길을 떠났을 때 초(楚)나라에서 소식을 들었다.
그 무렵 초소왕(楚昭王)은
패전의 악몽에서 벗어나 한창 의욕적으로 나라 재건에 힘을 쏟을 때였다.
- 이 기회에 학식 높은 공자(孔子)를 우리 나라로 초빙하자.
그는 사자를 보내 공자를 모셔오게 했다.
초소왕(楚昭王)은
친히 나와 공자를 영접했다.
그 동안 돌아다니며 받은 대접중 그나마 가장 극진한 환대였다. 초소왕은
그와 더불어 몇날 며칠을 얘기했다. 감동한 초소왕은 공자에게 이사(里社) 땅을 내리고 높은 벼슬에 등용할 것을 결심했다.
그러자 초나라 영윤 공자 신(申)이 위기를 느끼고 초소왕에게 간(諫)했다.
- 옛날 주문왕은 풍(豊) 땅에 있었고 주무왕은 호(鎬) 땅에
있어 그 사방 거리가 1백 리 안팎이었지만, 능히 큰 덕을
닦아 마침내 은나라를 멸하고 주(周)나라를 세웠습니다.
- 오늘날 알려진 공자의 덕(德)은 주문왕이나 주무왕에 못지않습니다. 또한 그의 제자들도 다 지혜롭고
어진 사람들뿐입니다. 만일 그들이 우리 나라를 터전으로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든다면 그때는 어찌할 작정이십니까?
그 말에 초소왕(楚昭王)은
공자를 등용할 생각이 눈 녹듯 사라졌다.
공자(孔子)는 초소왕의
변심을 눈치채고 즉시 초(楚)나라를 떠났다.
'이제는 어디로 갈 것인가?'
여러 날을 고민한 끝에 공자는 제자들을 이끌고 다시 위(衛)나라로 들어갔다.
위출공(衛出公)은
공자를 이용해 나라 안팎의 근심을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공자가 출사를 거절했다. 다만 그는 제자 자로(子路)와
자고(子羔)를 천거해 위나라에서 벼슬살이를 하게 했을 뿐이다.
그러는 동안 고국인 노(魯)나라에
다소간 변화가 일었다.
삼환의 최고 권력자인 계손사가 죽은 것이다. 계손사의 뒤를 이어
노나라 재상에 오른 사람은 계손사의 아들인 계손비(季孫肥)였다.
그는 공자의 제자들 중에 인재가 많다는 소문을 듣고 직접 위(衛)나라를 방문하여 공자를 찾아왔다.
- 자유(子有)를 보내주십시오.
공자가 아니라 그 제자 자유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자유는 지난날 계손사 밑에서 벼슬을 한 적이 있었다.
이 무렵 공자(孔子)는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그 자신 벼슬에 오를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제자들의 앞길을 막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는 계손비(季孫肥)의 청을 수락하고 자유(子有)를
계손비에게 내주었다. 자유의 귀국을 계기로 공자도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노(魯)나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이미 위출공에게 출사한 자로(子路)와 자고(子羔)만을 남겨두고
나머지 제자들과 함께 노(魯)나라로 돌아왔다. 천하를 역유(歷遊)한
지 13년 만의 귀국이었다.
이때 공자의 나이 68세.
공자의 제자 자유(子有)를
비롯하여 자공(子貢), 유약(有若), 복불제(宓不齊) 등은 공자에 의해 천거되어 노나라에서 벼슬을 살았다. 자신이 못
이룬 예(禮)와 인의(仁義)의 정치를 제자들을 통해 펼쳐보이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73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공자(孔子)는 5년 동안 노(魯)나라에 머물며 <시(詩)>와 <서(書)>와 <예(禮)>와 <악(樂)>에 대한 편찬 작업에 온 정열을 쏟아붓게 된다.
이 책들이 바로 유가 경전으로 전해오는 <시경(詩經)>, <서경(書經)>, <예기(禮記)>다. <악(樂)>은
전해오지 않는다.
첨부파일
-
제39 장 미인 서시西施 .docx (55.6K)
0회 다운로드 | DATE : 2023-02-19 10:17:10
관련링크
- 이전글제10권 오월춘추 제39장 미인 서시(西施) (3)~(4) 23.02.19
- 다음글[列國誌] 2부 장강의 영웅들 (298) 제38장 구천의 와신상담 (7)~(8) 23.02.19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