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권 오월춘추 제39장 미인 서시(西施)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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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장 미인 서시(西施) (3)
BC 490년이면 아직 공자가 천하를 역유(歷遊)하고 있을 때다.
오나라에서는 부차(夫差)가
고소대 공사에 한창 박차를 가할 무렵이요, 월나라에서는 구천(句踐)이 와신상담하며 미인계를 쓰기 위해 서시(西施)를 찾아내 훈련을 시키고 있을 무렵이다.
이 해, 동방의 패자국 제(齊)나라에 큰 변화가 일었다.
안영, 전양저 등 명재상과 명장수를 배출하여 전성기를 구가한
바 있는 제경공(齊景公)이
70세가 넘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제경공의 재위 58년.
참으로 오랫동안 군위를 누렸다.
그런데 문제는 제경공의 사후(死後)였다. 제경공의 부인은 연희(燕姬)다. 그녀는 일찍이 아들을 낳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 아들 또한 성장하지 못하고 죽었다.
제경공에게는 후궁의 몸에서 난 여러 아들이 있었다.
양생(陽生), 가(嘉), 구(駒), 검(黔), 서(鉏), 도(荼) 등 여섯 공자가 바로 그들이다.
이 중 제경공으로부터 가장 총애를 받은 아들은 막내인 공자 도(荼)였다.
그러나 공자 도의 나이가 워낙 어려 제경공(齊景公)은 그를 세자로 임명하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었다.
그러던 중 제경공(齊景公)이
병이 나 일어나지 못하게 되자 그는 대대로 제나라에서 벼슬을 살아온 상경 국하(國夏)와 고장(高張)을 불러
뒷일을 부탁했다.
- 내가 죽으면 공자 도(荼)를 군위에 세우고 충성을 다해주시오.
그러고는 나머지 공자들을 모두 내(萊) 땅으로 가서 살게 했다.
이를테면 추방이었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제경공이 노환으로 죽었다.
국하(國夏)와 고장(高張)은 제경공의 유언대로 나이 어린 공자 도(荼)를 군위에 올리고 자신들이 조정의 실권을 잡았다.
이 소식을 들은 내(萊)땅의
공자들은 목숨에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제각기 다른 곳으로 달아났다. 공자 양생(陽生)과 서(鉏)는 노나라로 망명하고, 공자
가(嘉)를 비롯한 나머지 공자들은 위(衛)나라로 달아났다.
이것을 보고 내(萊) 땅
백성들은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
경공(景公) 돌아가심이여!
공자들은 장사에도 참석 못 하고
3군(三軍) 일에도 관여치 못하네.
아아, 우리들은 장차
누구를 따라야 할 것인가.
공실의 어지러움과 나라 앞날의 불안함을 빗댄 노래였다.
이때 제나라 조정에 진걸(陳乞)이라는
대부가 있었다.
진걸은 일찍이 백성들에게 많은 은혜를 베푼 바 있는 진무우(陳無宇)의 아들이다. 진걸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를 펴지 못하던 국하와
고장이 하루아침에 조정의 실권을 거머쥐게 되자 속으로 여간 불만이 크지 않았다.
진걸(陳乞)은 아버지
진무우를 닮아 계교가 많고 쉽사리 속마음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는 이중적인 처세를 취했다. 겉으로는 국하(國夏)와
고장(高張)을 충실히 따르는 척하며, 뒤돌아서는 여러 대부들에게 두 사람을 비방했다.
즉 국하와 고장 앞에서는,
- 여러 대부들이 두 분을 제거하려 합니다. 그들이 일을 일으키기 전에 먼저 두 분께서 불만을 품은 대부들을 제거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큰 화를 당할 것입니다.
이렇게 염려하는 척했고, 다른 대부들에게 가서는 또,
- 국하(國夏)와 고장(高張)은 우리
제나라의 화근입니다. 그들은 주공을 손아귀에 넣고 지난날의 신하들을 모두 몰아내려 하고 있소. 그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요.
라고 속삭여대는 것이었다.
대부들은 모두 진걸의 말을 믿었다.
그 중 진걸의 말을 듣고 가장 분개한 사람은 포목(鮑牧)이었다. 포목은 제환공 때의 명신 포숙(鮑叔)의 후손으로 대대로 고씨나 국씨와는 사이가 나빴다.
이듬해인 BC 489년.
마침내 진걸(陳乞)과
포목(鮑牧)은 여러 대부들의 가병을 규합한 후 임금인 공자
도(荼)를 장악하기 위해 공궁을 들이쳤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국하(國夏)와 고장(高張)이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반란군을 공격했으나 임치성 내 장(莊)이라고
하는 큰 거리에서 패했다. 겨우 임치성을 탈출한 국하는 거나라로 도망쳤고, 고장은 노나라를 바라보고 달아났다.
하루아침에 제나라 조정의 실권은 진걸과 포목에게로 돌아갔다.
진걸(陳乞)은 좌상이
되고, 포목(鮑牧)은
우상이 되었다. 그들은 국씨와 고씨를 멸족시키지는 않았다.
국하의 아들 국서(國書)에게, 그리고 고장의 아들 고무비(高無丕)에게
각각 대를 잇도록 했다.
그런데 진걸(陳乞)은
애초부터 천민 소생인 제 6공자 도(荼)가 임금자리에 오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욱이 공자 도는 나이가
어렸다. 진걸은 평소 공자 양생과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리하여 그는 노(魯)나라에
사람을 보내 공자 양생(陽生)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였다. 아무도 양생의 귀국을 알지 못했다.
그해 10월, 진걸(陳乞)은 많은 대부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였다.
"내가 요즘 천하에 보기 드문 장사 한 분을 구했기에
여러 대부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이렇듯 오시라 한 것이오."
"천하장사라니 어떤 분이오?"
진걸(陳乞)은 큰
궤 하나를 내왔다.
궤 뚜껑을 열자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사람의 얼굴을
보는 순간 대부들은 깜짝 놀랐다. 노(魯)나라로 망명했던 제 1 공자 양생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내 진걸의 뜻을 알아차렸다.
포목(鮑牧)을 비롯한
몇몇 대부들이 반대 의사를 표했으나 집 안은 무장병사들에 의해 포위된 뒤였다. 대부들은 겁이 나 슬며시
일어나 공자 양생(陽生)에게 절을 올렸다. 포목도 어쩔 수 없이 공자 양생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진걸(陳乞)은 그
즉시로 수레를 준비시켜 공자 양생을 태워 궁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어린 공자 도(荼)를 끌어내고 그 자리에 공자 양생을 앉혔다.
이 임금이 제도공(齊悼公)이다.
제도공은 후환을 없애기 위해 공자 도를 태(駘)라는 땅으로 추방했다.
그러나 공자 도(荼)는 태 땅에 이르기
전에 제도공이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비운의 공자 도(荼)는 죽은 후에 시호를
받지 못했다.
그는 1년 남짓 군위에 올랐는데, 역사는 그를 '안자(安子)'라고 기록하고 있다. 안(安)은 공자 도의 이름이고 자(子)는
단순히 공자라는 뜻이다.
진걸(陳乞)은 진걸대로
포목이 자신의 뜻에 반대한 것에 앙심을 품고 제도공에게 간(諫)했다.
"없애버려야 합니다.
포목(鮑牧)이 국외에 망명중인 공자들과 비밀리
연락을 취하고 있다는 첩보입니다."
얼마 후 제도공(齊悼公)은
포목에게 역모죄를 뒤집어씌워 죽였다.
그러나 그 후손은 끊지 않고 포목의 아들 포식(鮑息)을 당주에 오르게 하여 포숙의 제사를 받들게 했다.
이로써 진걸(陳乞)은
재상에 올라 제도공을 능가하는 권세를 쥐게 되었다.
제39장 미인 서시(西施) (4)
제도공(齊悼公)은
자신의 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많은 반대파 대신들을 죽였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제경공 시절을 그리워하며 제도공을 미워하고 원망했다.
원망과 불만으로 가득 찬 백성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전쟁이다.
BC 487년(제도공 2년, 오왕 부차 9년).
마침 적당한 빌미가 생겼다.
이웃인 노(魯)나라가
주(邾)나라를 침공한 것이었다. 주나라는
제나라의 동맹국이자 제도공의 여동생이 시집간 나라다.
제도공(齊悼公)은
노애공이 주나라를 쳐 임금을 사로잡았다는 소식에 탁자를 내리치며 분노했다.
"노(魯)나라가 나의 매제인 주(邾)나라 임금을 잡아
감금했다는 것은 우리 제나라를 모욕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내 노나라를 쳐 복수하리라!"
그런데 제경공이 죽은 이후 제(齊)나라 군사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단독으로 노(魯)나라를
쳐 이길 자신이 없었다.
이 무렵, 중원에서 가장 군사력이 강한 나라는 오(吳)나라였다.
제도공(齊悼公)은
오왕 부차에게 사신을 보냈다.
- 함께 노나라를 쳐 땅을 나누어 가집시다.
오왕 부차(夫差)는
월나라를 쳐 속국으로 삼은 뒤 기고만장해 있었다.
천하에 자신을 당할 자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제도공의 청을 듣고 뛸 듯이 기뻐했다.
- 내가 전부터 산동 쪽으로 진출할 생각을 품고 있었는데, 이제야 그 기회가 왔구나.
그 해 여름, 부차(夫差)는 노나라에서 망명해온 공산불뉴(公山不狃)를 길 안내자로 삼아 노(魯)나라를
향해 쳐들어갔다.
공산불뉴는 노나라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이 컸다. 그는 오군(吳軍)을 안내하면서 전날 자신을 핍박했던 땅에 이르러서는 닥치는 대로
방화하고 약탈하고 살육했다.
이에 맞추어 제도공(齊悼公)도
군사를 일으켜 노나라 땅으로 쳐들어갔다.
그들은 삽시간에 노(魯)나라
동쪽 일대의 땅을 빼앗았다.
제 ㆍ오 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기겁한 것은 노애공이었다.
노애공(魯哀公)은
자신의 힘으로 제ㆍ오 연합군을 상대할 수 없음을 알고 재빨리 사자를 보내어 제도공에게 화해를 청했다.
"이미 주(邾)나라 임금을 석방하여 돌려보냈습니다. 앞으로는 절대로 주나라를 괴롭히지
않을 터이니, 제공(齊公)께서는
그만 화를 푸시고 군사를 물려주십시오."
제도공(齊悼公)도
오랫동안 군사를 밖으로 내면 국내에 변이 생길까 두려웠다. 그는 못 이기는 척 노(魯)나라의 사죄를 받아들이고 빼앗은 땅을 돌려준 후 노애공과 화해했다.
아울러 대부 공맹작(公孟綽)을
오왕 부차에게 보내어 말했다.
"우리는 이미 노나라와 화해했으니, 오(吳)나라는 더 이상
수고스럽게 노나라를 칠 필요가 없습니다."
이 같은 제도공의 변덕에 부차(夫差)는 기분이 몹시 상했다.
공맹작을 향해 큰소리로 꾸짖었다.
"우리 오(吳)나라가 제나라 뜻에 움직이는 꼭두각시인 줄 아느냐?"
이때는 이미 해가 바뀌어 BC 486년이 되었다.
부차(夫差)는 노나라에
나가 있는 군대를 소환하기는 했으나 제나라에 대해 몹시 좋지 않은 감정을 품었다.
그 해 가을철에 부차는 한(邗) 땅에 성을 쌓고 장강과 회수를 연결하는 운하를 뚫었다. 언제든지
뱃길로 제나라를 침공하기 위해서였다.
한 땅은 오늘날 안휘성 양주 땅이다.
한편, 노애공(魯哀公)은 오왕 부차가 제나라에 대해 화를 냈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해 자기 나라를 쳤던 제도공에 대해 복수하려는 마음을
품었다.
'이번에는 우리가 오(吳)나라와 연합하여 제(齊)나라를
치자!'
이렇게 마음먹은 노애공은 사자를 오나라로 보내어 연합을 청했다.
부차로서는 기다리던 일이었다.
이듬해인 BC 485년 정월,
마침내 오ㆍ노 연합군은 각각 서쪽과 남쪽 길을 통해 제(齊)나라 땅으로 쳐들어갔다. 여기에 담(郯)나라 군사까지 가세했다.
부차(夫差)는 눈
깜짝할 사이 제나라 남쪽 땅인 식(鄎) 땅을 점령하고 그 곳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이 바람에 제(齊)나라는
큰 분란에 휘말렸다.
제도공을 원망하는 백성들의 소리가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 우리 임금이 공연히 오(吳)나라와 노(魯)나라 군대를
끌어들였다. 이 모든게 주공의 책임이다.
이때 진걸(陳乞)은
병에 걸려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고, 제나라 정권은 그 아들 진상(陳常)이 물려받고 있었다. 진상은 백성들의 원망을 잘 알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자기마저 돌팔매의 대상이 될 것 같았다.
진상(陳常)은 포목의
뒤를 이어 포씨 당주가 된 포식에게 접근하여 은밀히 사주했다.
"오늘의 화란(禍亂)은 모두 주공이 불러들인 것이나 마찬가지요. 지금 나라안이 전쟁으로
어지러우니, 이 기회에 주공을 죽여 오(吳)나라의 오해를 풀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합시다. 주공을 죽이는 일은
그대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길이기도 하오."
포식(鮑息)은 진상이
자기를 이용해 제도공을 살해하려는 것을 알고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는 신하로서 임금을 죽이는 일에는 참여하지 않겠소."
제도공이 아무리 폭군이라고는 하지만 포숙 이래 대대로 제(齊)나라 은혜를 받아온 명문가 후손으로서 난신(亂臣) 대열에 낄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진상(陳常)은 머쓱했다.
"그대가 못 하겠다면,
내가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임금을 없애겠소."
며칠 후였다.
제도공(齊悼公)은
성밖으로 나가 싸움터로 나가는 군사들을 사열한 후 다시 궁으로 돌아왔다.
진상이 제도공을 위로한다는 핑계로 술을 따라주었다.
그런데 그 술에는 무서운 짐독(鴆毒)이 들어 있었다. 제도공은 술을 받아마신지 한식경이 못 되어 아홉
구멍으로 피를 쏟으며 죽었다.
진상(陳常)은 오왕
부차에게 사람을 보내 지난날의 일을 사죄했다.
- 우리 주공께서 급살병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지난해의 일은 오로지 선군(先君)의
독단이었습니다. 이제 그 선군도 죽었으니, 오왕께서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종묘사직만이라도 보존케 해주십시오. 그러면 우리 제(齊)나라는 은혜를 잊지 않고 대대로 오나라를 섬기며 우호를 다지겠습니다.
오왕 부차(夫差)는
제도공이 죽은데다가 항복이나 다름없는 화해를 청해오자 크게 만족했다.
영채 밖으로 나가 제도공의 죽음을 애도하는 척하다가 군사를 거느리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노(魯)나라도 군대를
철수시켰다.
제나라 백성들은 제도공이 독살당한 것을 짐작했으면서도 그 일을 따지려들지 않았다. 오히려 속으로 기뻐했다. 그만큼 제도공(齊悼公)은 대부들과 백성들에게서 인심을 잃고 있었다.
오군이 회군하자 진상(陳常)은
제도공의 아들 공자 임(任)을 받들어 군위에 세웠다.
그가 제간공(齊簡公)이다.
제간공은 군위에 오르자마자 진상(陳常)을 우상에 임명하고 함지(鬫止)를 좌상에 올렸다.
그해 3월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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