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0장 오자서(伍子胥)의 죽음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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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0장 오자서(伍子胥)의 죽음 (7)
운하가 완성되자 부차(夫差)는
수시로 회수와 제수를 넘나들며 제ㆍ노ㆍ위ㆍ 진(晉) 등 북방의
여러 나라와 교분을 맺었다.
BC 482년(오왕
부차 14년)이면 오자서가 자결한 지 만 2년이 지난 때다.
그 해 여름, 오왕 부차(夫差)는 친히 북쪽으로 나가 진(晉)ㆍ노ㆍ위나라
군주를 황지(黃池) 땅으로 초빙해 맹회를 열기로 결심했다.
-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맹주자리에 오르리라!
그 과정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질지도 몰랐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그는 전군을 동원하여 여러 제후를 위압함으로써 '패공(覇公)'이라는 지위를 얻어낼 결심이었다.
이때 오나라 세자는 부차의 아들 우(友)였다. 그의 성격은 아버지 부차와는 딴판이었다.
더욱이 어릴 적부터 스승이나 다름없는 재상 오자서(伍子胥)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월(越)나라가 굴욕을
감내하면서 오(吳)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있는 것이 결국은
복수를 위한 한 방편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이런 월나라를 방치한 채 조만간 아버지가 전군을 거느리고 북상할 것이라는 사실을 안 세자 우(友)는 염려하는 마음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에 우리 대군이 중원 땅으로 들어가면 우리 오(吳)나라는 텅 빈다. 그동안
방패막이가 되어주었던 오자서(伍子胥) 장군도 죽고 없다. 월왕 구천(句踐)은필시
우리 땅을 침공할 것이다. 이 일을 어찌 감당할 것인가.'
세자 우(友)는 아버지의
북행(北行)을 만류하고 싶었다.
그러나 오자서가 자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유를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섣불리 간(諫)했다가
그 자신 무슨 해를 당할지 알 수 없었다.
겁이 났다.
그렇다고 이대로 앉아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세자 우(友)는 여러
날을 고심하다가 한 가지 계책을 생각해냈다.
풍자와 비유로써 아버지에게 간(諫)하기로 한 것이었다.
어느 날 아침이었다.
세자 우(友)는 탄궁과
탄환을 준비하여 후원으로 들어갔다가 점심 때쯤 되어 내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진흙탕 속에라도 빠졌는지
옷이 젖은 채 온통 흙투성이였다.
부차(夫差)가 이상히
여기고 물었다.
"어디서 뭘하고 왔기에 그렇게 옷을 버렸느냐?"
세자 우(友)가 대답했다.
"소자는 후원으로 새를 잡으러 갔다가 높은 나무 위에서
매미가 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소자는 또 사마귀 한 마리가 매미를 노리고 접근해 가는 것도 보았습니다."
"하지만 매미는 노래 부르는 데 열중한 나머지 사마귀가
저를 잡아먹으려고 가까이 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옆 나뭇잎 사이에는 참새
한 마리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 참새는 사마귀를 노리고 있었지요."
"그러나 그 사마귀 역시 매미에 정신을 팔려 자기에게
닥친 위험을 알지 못했습니다. 소자는 기회다 싶어 사마귀를 노리고 있는 참새를 향해 탄궁을 꺼내들고
조심스럽게 다가갔습니다. 한데 또 어찌 알았겠습니까? 제
발 밑에 진흙투성이의 물구덩이가 패어 있을 줄이야."
"결국 소자는 참새에 정신이 팔려 발을 헛디고 그 구덩이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소자가 옷을 버리게 된 내력입니다."
오왕 부차(夫差)가
꾸짖었다.
"너는 눈앞의 이익만 탐하고 뒷일을 생각하지 않았으니, 결코 현명한 자라 할 수 없다. 그래 가지고 어찌 나의 뒤를 이어받겠느냐?"
"부왕의 말씀이 옳습니다. 소자는 천하에 가장 어리석은 자입니다. 노(魯)나라는 주공 단(旦)의 후예이며 공자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제(齊)나라는 무고히 노나라를 침범했습니다. 그러나 제나라는 우리 오(吳)나라가
장강과 회수를 건너와 자기네 등 뒤를 칠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또한 우리 오(吳)나라는 제나라를 쳐서 이겼지만, 월왕 구천(句踐)이 등 뒤에서 칼을 갈며 이제나저제나 쳐들어올 궁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왕의 말씀대로라면 천하에 이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부차(夫差)는 그제야
아들이 자신에게 간(諫)하고 있음을 알고 크게 화를 내었다.
"이놈의 말버릇이 오자서와 똑같구나. 너마저 오자서(伍子胥)를
닮아 나의 패업지도를 방해하려 드는 것인가. 한 번 더 그런 소리를 하면 너를 내 자식으로 취급하지
않을 것이다."
이 한마디에 세자 우(友)는
얼굴이 새하얘져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났다.
그는 너무나 겁이 많았던 것이다.
마침내 오왕 부차(夫差)는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오성을 출발하여 황지(黃池) 땅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노나라 탁고 땅에 들러 노애공(魯哀公)과 회견을 했다.
탁고는 오나라 영토로 지금의 강소성 소현(巢縣) 서북쪽 일대다.
이어 운(隕) 땅에서는
위출공을 불러내어 회담을 했다.
위출공(衛出公)은
오왕 부차와 회견할 마음이 없었으나 그가 거느린 군대가 10만이 넘는다는 소리에 못 이기는 척 부차의
초청에 응했다.
부차(夫差)는 또
진정공(晉定公)을 황지로 불러내기 위해 진(晉)나라로 사자를 보냈다.
- 과인은 지금 제나라를 진압하고 진(晉)ㆍ 위ㆍ노나라 등과 맹방지의(盟邦之義)를 맺고자 하오. 진공(晉公)은 이러한 나의 뜻을 받들어 황지로 나와주기 바라오.
오만불손한 격문이었다.
이때 진나라 군주는 진정공(晉定公)이었으나, 실제 권력자는 조앙(趙鞅)이었다.
조앙은 오나라와 싸울 마음이 없었다. 진정공을 모시고 황지 땅으로
나갔다.
황지는 황정(黃亭)이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하남성 봉구현 서남쪽 땅이다.
진정공과 조앙이 황지 땅에 도착했을 때는 BC 482년 6월.
이로써 오왕 부차(夫差)는
자신의 소망대로 북방 여러 제후들과 회맹을 열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황지 회맹'이다.
'이제 남은 것은 내가 맹주자리에 오르는 일뿐이다.'
회맹에서 맹주자리에 오른다는 것은 곧 패공(覇公)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동안 오(吳)나라는
중원 제후국들로부터 오랑캐라 멸시받아 오지 않았던가.
부차(夫差)는 득의양양했다.
한편으로는 들뜬 가슴을 누를 수 없었다.
부차(夫差)는 대부
왕손락을 불러 명했다.
"이제 내일이면 회맹을 열 것인데, 누가 맹주가 될 것인가를 미리 정하지 않으면 혼란만 일어날 것이다. 그대는
진나라 재상 조앙(趙鞅)에게로 가서 이 문제를 의논해오라."
부차(夫差)가 진나라를
지목한 것은 그 동안 중원의 패자로 자처해온 나라가 바로 진(晉)나라였기
때문이었다.
진나라 재상 조앙(趙鞅)도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그의 주장은 이러했다.
- 우리 진(晉)나라는 진문공 이래 대대로 중원의 맹주로 군림해왔소. 어찌 오(吳)나라에 맹주자리를 넘겨줄 수 있으리오.
이에 대해 왕손락(王孫駱)은
필사적으로 반박했다.
- 희씨 성을 가진 주왕실의 제후들 중 가장 항렬이 높은 것은
바로 태백(太伯, 주문왕의 백부)의 후예인 우리 오(吳)나라요. 비록 지금까지는 진(晉)나라가
맹주 노릇을 했다지만, 이제부터는 우리 오나라가 맹주가 되어야 할 것이오.
- 더욱이 우리는 초(楚)나라를 격파하고 제(齊)나라를
굴복시켰소. 이에 비해 진나라가 한 것은 무엇이오? 고작
정(鄭), 위(衛) 등 조그만 나라들만 협박하여 입술에 피를 발랐을 뿐이 아니오? 이제
시대는 변했소. 우리는 이 문제를 결코 양보할 수 없소.
조앙(趙鞅)과 왕손락(王孫駱)은 밤이 깊도록 맹주자리를 놓고 토론을 벌였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이 때문에 회맹이 며칠 연기되었다.
그런데 뜻밖의 사태가 일어났다.
그 사태는 황지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남쪽 오나라 땅에서 발생했다.
오자서(伍子胥)가
예상했던 대로 월왕 구천(句踐)이 오나라를 향해 공격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제 40장 오자서(伍子胥)의 죽음 (8)
'기회다!'
월왕 구천(句踐)은
부차가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황지로 향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마자 눈을 매처럼 번뜩였다.
범려와 문종을 불러 물었다.
"이제 오자서도 죽었소. 더욱이 오왕(吳王)은
맹주자리에 눈이 멀어 도성을 비운 채 북방에 나가 있소. 지금이야말로 군사를 일으켜 오나라를 칠 때가
아닌가 싶소."
범려(范蠡)와 문종(文種)이 동시에 대답했다.
"바야흐로 오(吳)나라를 칠 때입니다."
그 날부터 월나라 전역은 전시 체제로 돌입했다.
모든 지휘는 재상 범려(范蠡)가
맡았다.
- 대부 주무여(疇無餘)는 전위부대를 거느리고 오나라 국경을 돌파하라.
- 나머지 장수들은 수군과 육군으로 나누어 왕을 모시고 일시에
오성을 들이치라.
수군 2천 명은 문종(文種)이 지휘하기로 했다.
육군 4만 명은 범려(范蠡)가 직접 거느렸다. 친위부대 6천
명은 구천을 호위하며 상황에 따라 움직이는 별동대 역할을 겸하기로 했다.
마침내 월(越)나라 5만 대군은 강과 바다와 육로를 따라 일제히 오나라로 쳐들어갔다. 전위(前衛)대장 주무여가 가장 먼저 오나라 국경을 돌파했다.
이때 오(吳)나라
영토를 지키고 있던 군대는 불과 1만.
세자 우(友)가 도성
수비 책임자였고, 그 동생 공자 지(地)와 왕손미용(王孫彌庸)이
그를 보좌하고 있었다.
세자 우는 비록 전투 경험이 없었지만 월나라 침공에 대해 나름대로 철저한 방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세자 우(友)는 월나라
선봉자 주무여(疇無餘)가 오성 교외에 이르렀다는 보고에 접하자
왕손미용을 불러 명했다.
"주무여는 공을 앞세워 마구 덤벼들 게 분명하오. 복병을 이용하면 그들의 예기를 꺾을 수 있을 것이오."
왕손미용(王孫彌庸)은 5천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주무여를 맞이해 싸웠다.
과연 주무여(疇無餘는 단숨에 공을 세우겠다는 욕심이 앞서 저돌적으로
덤벼들었다. 왕손미용은 쫓기는 척하다가 좌우로 숨겨둔 복병을 이용하여 월군을 크게 무찔렀다.
첫 싸움은 방어군인 오군(吳軍)의
승리였다.
그러나 월왕 구천(句踐)으로서는
와신상담하며 10년을 기다려온 복수전이었다. 전위부대가 패했다
하여 공세를 늦출 리 없었다.
다음날 구천(句踐)과
범려(范蠡)가 거느린 5만
대군이 일시에 도착하여 오성을 포위했다. 오나라 세자 우(友)는 새카맣게 몰려드는 월군을 보자 금방 기세가 꺾였다. 감히 나가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성문을 굳게 닫아걸었다.
그러자 전날 싸움에서 이긴 왕손미용(王孫彌庸)이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세자 우(友)에게 말했다.
"월나라 군사는 이제껏 한 번도 오(吳)나라를 이긴 적이 없습니다. 때문에
아직도 우리 나라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1천
리 길을 달려왔기 때문에 매우 지쳐 있습니다."
"이 기회에 한 번 더 싸워서 이기면 저들은 틀림없이
후퇴할 것입니다. 만일 싸워서 이기지 못하면 그때 성문을 닫아걸고 지켜 왕이 돌아올 때를 기다려도 늦지
않습니다."
세자 우(友)가 생각해보니
그럴듯했다. 그는 다시 왕손미용에게 군사를 내주어 나가 싸우게 하고 자신도 그 뒤를 따랐다.
월왕 구천(句踐)은
성문이 열리고 오군이 나오는 것을 보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내가 오늘에야 오성을 점령할 수 있겠구나."
구천은 오군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외쳐댔다.
- 공격하라!
두 나라 군대가 하나로 엉키어 싸우기 시작했다.
범려(范蠡)는 월군의
대형을 학의 날개 모양으로 펴 수가 적은 오군을 포위해 나갔다. 오나라 군사 중 전투 경험이 풍부한
정예부대는 오왕 부차를 따라 황지로 나갔다. 남아 있는 군사들의 대부분은 전투 경험이 전혀 없었다.
반면 월군(越軍)은
범려의 지휘 아래 10년간을 훈련해왔다.
검극(劍戟)과 궁노(弓弩)를 집중적으로 연마해온 정병 중의 정병이었다. 게다가 숫자상으로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왕손미용(王孫彌庸)이
아무리 매복계를 썼지만 끊임없이 밀려드는 월군의 사나운 기세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끝내 그 날 싸움에서 왕손미용(王孫彌庸)은 월군 장수 설용(泄庸)의
창에 아랫배가 찔려 죽었고, 세자 우(友) 또한 여러 대의 화살을 맞고 병차에서 떨어졌다.
월군이 그를 사로잡기 위해 몰려들자 그는 재빨리 땅에 떨어져 있던 칼을 주워들어 자신의 목을 찌르고 자결했다.
두 번째 싸움에서 오군을 대파한 월군(越軍)은 일제히 오성으로 밀려들었다.
성을 지키고 있던 공자 지(地)는
기겁을 했다. 성문을 닫아건 채 일체 응전하지 않았다.
오성(吳城)은 일찍이
오자서가 중원 북방의 성을 모방하여 지었다. 견고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무리 훈련을 많이 한 월군이었지만 성곽 싸움에는 익숙치 않았다.
월왕 구천(句踐)은
어쩔 수 없이 장기전 태세로 돌입했다.
2천 수군을 태호(太湖)에 집결시키고, 4만 육군을 서문(胥門)과 창문(閶門) 사이에
주둔시켰다.
구천(句踐)은 범려를
불러 명했다.
서문과 창문은 다 오성의 서쪽 성문이다.
- 고소대(姑蘇臺)를 불지르시오.
범려는 1천 군사를 이끌고 고소산으로 달려가 웅장하기 이를 데
없는 고소대에다 불을 질렀다.
고소대(姑蘇臺)는
이내 거센 불길에 휩싸였다. 불길은 열흘이 지나도록 사그라질 줄 모랐다.
공자 지(地)가 지휘하는
오나라 군사들은 오성 위에 올라 고소대를 태우는 불길만 구경할 뿐 감히 나와 싸우질 못했다.
그들로서는 하루빨리 오왕 부차(夫差)가 귀국하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 이전글제 40장 오자서(伍子胥)의 죽음 (9) 23.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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