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장 오월춘추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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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1장 춘추(春秋), 덧없는 사라짐이여 (7)
다음날이었다.
범려(范蠡)는 아침
일찍 일어나 목욕재계한 후 왕궁으로 들어갔다.
구천 앞에 이르러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신(臣)이 알기로, 임금이 굴욕을 당하면 그 신하는 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지난날 왕께서 회계산(會稽山)에서
오왕 부차에게 갖은 굴욕을 당하셨습니다만, 신이 죽지 않고 오늘까지 살아온 것은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오(吳)나라에 원수를 갚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오나라는 멸망했고, 왕께서는 높으신 뜻을 이루었습니다."
"............................?"
"이제 신이 할 일은 없습니다. 재상이라는 직책과 명성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대왕의 곁을 떠나 강호(江湖)로
물러나 조용히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범려의 말을 들은 구천(句踐)은
깜짝 놀랐다.
비록 서시의 일로 소원한 관계가 되기는 하였으나 그를 멀리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秋毫)도 없었다.
"그대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게요? 과인이 오늘날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다 그대 덕분이오. 과인은
장차 이 나라의 반을 그대에게 내주려 하오. 이제 와서 나를 버리고 떠나려 하다니, 그것은 안 될 말이오!"
"신(臣)의 마음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범려의 단호한 대답에 구천(句踐)은 다급했다.
얼떨결에 모진 말을 토했다.
"만일 그대가 떠난다면 나는 그대의 처자를 모두 죽여
없애버리겠소!"
범려(范蠡)는 어이가
없었다.
그런 말이 어찌 구천의 입에서 나올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속으로 더욱 굳게 결심했다.
"죄가 있다면 신에게 있을 뿐, 신의 처자에게 무슨 죄가 있습니까? 하지만 살리고 죽이는 것은 왕에게
달렸으니 죽이고 싶다면 죽이십시오. 신(臣)은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왕궁을 물러나온 범려(范蠡)는
그 날 밤 잠든 가족들을 깨워 집을 나섰다.
먼저 스승이자 동료 대부인 문종의 집으로 가 편지 한 장을 담장 안에 던져넣었다.
그러고는 강가로 나가 일엽편주(一葉片舟)에 올라탔다. 달빛이 은은히 비치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아름다운 밤이었다.
그 밤의 어둠 사이로 범려와 그 가족을 태운 일엽편주는 서서히 사라져갔다.
이튿날 아침, 월왕 구천(句踐)은 기분이 이상했다.
사람을 보내 범려를 불러오게 했다. 그러나 심부름 갔던 내관은
혼자 돌아왔다.
구천은 낙심했다.
"기어코 떠났단 말인가?"
이번에는 문종(文種)을
불러 물었다.
"사람을 뒤쫓아 보내면 범려를 데려올 수 있겠소?"
문종이 대답했다.
"범려(范蠡)는 귀신도 측량할 수 없는 재주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가 몰래 떠났다면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한편, 왕궁을 나서는 문종(文種)은 서운함을 금할 수 없었다.
마음 터놓고 지내는 유일한 동료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에게 말 한마디 없이 떠나간 범려(范蠡)가 이해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자 가재(家宰)가
편지 한 통을 내밀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이것이 마당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곧 전해드리려 했습니다만, 주인께서 이미 궁으로 들어가신 뒤라 지금
전해드리는 것입니다."
문종(文種)은 봉함을
뜯었다.
범려의 친필 서신이었다.
내용은 이러했다.
하늘을 나는 새가 잡히면 활은 거두어지게 마련이고, 숲 속의
토끼가 잡히면 사냥개는 삶아지는 법이오.
이제 와 말하지만, 월왕 구천(句踐)은 목이 길고 입이 새의 부리처럼 뾰족한 '장경오훼의 상(相)'이오.
이런 사람은 어려움은 함께할 수 있어도 즐거움은 같이할 수 없소.
그래서 나는 떠나는 것이오.
그대에게 우정으로 말하노니, 그대도 편안한 여생을 보내고 싶거든
벼슬을 버리고 강호(江湖)로 들어가시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불행을 면치 못할 것이오.
- 숲 속의 토끼가 모두 잡히면 사냥개는 삶아지는 법.
토사구팽(兎死狗烹)이란
말은 이렇게 해서 생겨났다.
어떤 사람들은 '토사구팽'의
유래를 한고조 유방(劉邦)과 그 장수 한신(韓信)의 고사에서 찾기도 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한신이 죽으면서 외친 '토사구팽'은 실은 범려의 말을 인용한 것뿐이다.
문종(文種)은 하루
종일 우울했다.
범려(范蠡)가 남긴
편지의 내용이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니다. 이번 일만은
범려가 틀렸다.'
그는 월왕 구천(句踐)이
지난날을 잊고 함께 고생한 신하들을 버릴 리 없다고 스스로에게 외쳐댔다.
'범려(范蠡)의 염려는 너무 지나친 것이다.'
그는 사직서를 내지 않았다.
범려(范蠡)가 회계성에서
사라진 지 두 달쯤 지나서였다.
왕궁 내에 해괴한 사건이 벌어졌다.
어느 날 갑자기, 구천의 후궁인 천하절색 서시(西施)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었다.
왕궁은 발칵 뒤집혔다.
특히 구천(句踐)의
놀라움과 걱정은 극에 달했다.
모든 시종과 궁녀들이 동원되어 서시(西施)를 찾느라 혈안이 되었다.
다만 월왕 구천의 아내인 월부인(越夫人)의 처소만 아무 일 없었던 듯 조용했다.
그 다음날 밤이었다.
모두들 잠든 어둠 사이로 한 내관이 나타나 월부인의 처소로 숨어들었다.
월부인(越夫人)은
조용히 방문을 열고 그 내관을 맞아들였다.
"어찌 되었는가?"
내관이 들릴 듯 말듯 대답했다.
"분부하신 대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처리했습니다. 지금쯤 서시(西施)는
등에 큰 돌을 짊어진 채 포양강(浦陽江)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물고기 밥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월부인(越夫人)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이제야 나라를 망치는 요물을 없앴구나. 너는 절대로 이 일을 발설해서는 안 되느니라."
"염려 마십시오. 저승에
가서도 이 일만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겠습니다."
얼마 후 회계성의 백성들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다.
- 범려(范蠡)가 서시를 데리고 태호(太湖)에
가서 함께 노닐고 있다더라.
또 다른 소문도 돌았다.
- 서시(西施)가 월나라를 망치지나 않을까 염려한 나머지 범려가 서시를 납치하여 강물에 던져 죽였다더라.
어쨌거나 그 뒤로 서시를 보았다는 사람은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럴 리 없다.'
처음에는 서시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월왕 구천(句踐)도 세월이 지남에 따라 그녀를 잊어갔다.
서시(西施)만 잊은
게 아니라 고난을 함께했던 신하들도 잊어갔다.
제 41장 춘추(春秋), 덧없는 사라짐이여 (8)
월왕 구천(句踐)은
오(吳)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 패업을 달성하는 데 공로가
큰 신하들에게 일절 상을 내리지 않았다.
- 내가 부차의 똥을 먹고 있을 때 그대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자신의 공만 내세웠다.
차츰 대신들의 모습이 조정에서 하나둘씩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계예(計倪)는 일부러
미친 사람 흉내를 내어 조정에서 쫓겨났고, 예용(曳庸)도 늙었음을 핑계삼아 벼슬을 내려놓았다.
옛 신하들이 한명 한명 사라질 때마다 문종(文種)은 범려의 서신을 떠올리곤 했다.
- 어려움은 함께할 수 있어도 즐거움은 함께할 수 없는 사람.
마침내 문종도 병들었다 핑계하고 궁에 들어가지 않았다.
어느 시대 어느 장소를 막론하고 정치 세계에서는 정적(政敵)이 있게 마련이다.
월나라 조정에도 문종(文種)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문종이 모습을 보이지 않자 월왕 구천을 찾아가 말하곤 했다.
"문종(文種)이 궁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왕께서 그에게 상을 내리지 않아 불만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반(謀反)에 대비하셔야
할 줄로 압니다."
"문종이 그럴 리 있겠소?"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의 가슴속에는 문종을 의심하는 마음이 가득차게 되었다.
그러던 중 월왕 구천(句踐)이
노나라를 방문해야 할 일이 생겼다.
그는 자기가 없는 틈을 타 문종이 반역을 일으킬 것이 두려웠다. 그리하여
그는 노(魯)나라로 떠나기 전 문병을 핑계로 문종의 집을
찾았다.
문종(文種)은 일부러
아픈 시늉을 하며 구천을 맞아들였다.
구천(句踐)이 자리에
앉아 물었다.
"과인이 듣기에 뜻있는 선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을까만 근심한다고 하였소. 일찍이 그대는 오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일곱
가지 계책을 내세웠소."
"과인은 그 중 여섯 가지 계책을 씀으로써 오(吳)나라를 무찔렀소. 이제
남은 계책은 하나이오. 지혜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난(亂)을 일으키게 하자는 것이 바로 그것이오. 그대는 이 계책을 어디다
쓸 생각이오?"
문종(文種)은 구천의
말뜻을 몰라 한참 후에야 대답했다.
"오나라는 이미 멸망했습니다. 신(臣)은 그 계책을
쓸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가르쳐주겠소. 바라건대 그대는 부차에게 가 그 계책을 써주시오."
말을 마치자 구천(句踐)은
자리에서 일어나 궁으로 돌아갔다.
문종(文種)이 문
밖까지 나가 전송하고 돌아오자 구천이 앉아 있던 자리에 칼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문종은 그 칼을 들어 살폈다.
칼집에 두 글자가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 촉루(屬鏤).
지난날 오왕 부차가 오자서에게 내린 바 있던 바로 그 칼이었다.
그제야 문종(文種)은
구천이 자신의 집으로 행차한 이유를 깨달았다.
하늘을 우러러 길게 탄식했다.
"아아, 나는
참 어리석구나. 내 진작 범려의 말을 들었더라면 오늘 이 같은 일을 당하지 않았을 것을."
그러다가 불현듯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문종(文種)은 텅
빈 방안을 돌아다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1백년 후 세상 사람들은 반드시 나와 오자서를 충신이라고
할 것이다. 내 어찌 탄식만 할 것인가."
문종을 칼을 뽑아 입에 물고 엎어졌다.
월왕 구천(句踐)은
문종이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비로소 안도하는 숨을 내쉬었다. 그의 생전의 공을 인정하여 와룡산(臥龍山)에 장사 지내주었다.
후세 사람들은 그 산을 '종산(種山)'이라고 고쳐 불렀다.
문종(文種)이 묻힌
산이라는 뜻이다.
문종이 와룡산에 묻힌 지 1년이 지났다.
어느 날, 큰 해일(海溢)이 일어 와룡산 일대를 휩쓸었다.
마을 사람들은 물난리를 피해 높은 지대로 올라갔다.
별안간 이상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저기를 보아라."
와룡산 골짜기를 덮친 바닷물이 세찬 물결을 일으키며 빠져나가고 있었는데,
문득 오자서(伍子胥)와 문종(文種)이 앞뒤로 그 파도를 타고 바다 쪽으로 사라지는 게 아닌가.
오늘날도 전당강(錢塘江)에
조수가 밀려들 때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 앞의 물결은 오자서요, 뒤따라가는
물결은 문종이다.
뒷 이야기 하나.
한밤중에 몰래 회계성을 떠나온 범려(范蠡)는 아무런 미련 없이 배를 타고 태호(太湖)를 빠져나와 바닷길을 통해 제(齊)나라에
도착했다.
그가 당도한 땅은 산둥 반도 해변의 어느 작은 마을이었다.
풍광이 아름다웠다.
- 이곳 에서 농부가 되어 살리라!
그는 과거의 신분을 숨기려고 성과 이름을 모두 바꾸었다.
스스로 치이자피(鴟夷子皮)라
불렀다.
치이란 말가죽으로 만든 술부대다.
지난날 부차(夫差)는
오자서의 시체를 말가죽 부대에 담아 강물 속에 던졌는데. 자신의 처지가 오자서와 같다하여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농사를 지으며 해변가에 정착했다.
그는 경륜이 밝고 지식이 풍부하여 농사일에도 여간 밝지 않았다. 황무지를
개간하여 비옥한 농토로 만들었으며 토질에 알맞은 곡물을 심어 해마다 생산물을 늘렸다. 또한 나라를 다스리듯
그 수확물을 잘 관리하여 수년이 지나지 않아 범려(范蠡)는
일약 수십만 금(金)의 거부가 되었다.
어느덧 그의 이름은 제(齊)나라
일대에 널리 알려졌다.
- 동해 바닷가에 '치이자피'라는 신선 같은 사람이 나타나 수십만 묘(畒)의 농토를 일구었다.
어느 때인가 제나라 군주인 제평공(齊平公)이 그 명성을 듣고 친히 찾아와 간곡히 부탁했다.
- 그대는 그대의 현명함으로 우리 제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주시오.
범려(范蠡)는 임치로
올라가 제(齊)나라 재상자리에 올랐다.
3년 동안 제나라 백성들에게 개간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원래 그의 마음은 정치나 벼슬에 있지 않았다.
그는 아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 농사를 지어서는 천금의 재산을 이루고 벼슬에 있어서는 상국(相國, 재상)에 달했으니, 이는 사람으로 태어나 정점(頂點)에
다다른 것이나 마찬가지다. 모름지기 정점이란 위험하다. 환란이
닥치기 전에 이 곳을 떠나자.
범려(范蠡)는 아무런
미련 없이 재상직을 사퇴했다.
수십만 금(金)의
재산도 아낌없이 풀어 친구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러고는 어느 날 밤 홀연 임치성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이번에 범려(范蠡)는
도라는 땅으로 갔다.
도(陶)는 지금의
산둥성 정도현 서북쪽 땅으로 송(宋)나라와 제(齊)나라 국경 근처였다. 물품이
쌀 때는 사들이고 물품이 부족하기를 기다렸다가는 일제히 내다 팔았다.
매번 1할의 이윤을 남겼고, 오래지
않아 그의 재산은 또 수천만 금(金)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또 한 번 명성을 황하 일대에 떨쳤다.
언제부터인가 세상 사람들은 그를 '도주공(陶朱公)'이라고 부르며 존경했다.
범려(范蠡)는 돈을
버는 일에도 능했지만 쓰는 방법도 잘 알았다.
- 이전글제41장 오월춘추 9 23.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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