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의 쓸모 - 손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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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의 집에 갔더니 기우뚱한 식탁 다리 밑에 책을 받쳐놓았다
주인 내외는 시집의 임자가 나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차린 게 변변찮아 어떡하느냐며
불편한 내 표정에 엉뚱한 눈치를 보느라 애면글면
(...)
시집이 이토록 쓸모도 있구나
책꽂이에 얌전히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기보단
한쪽 다리가 성치 않은 식탁 아래로 내려가서
국그릇 넘치지 않게 평형을 잡아주는,
오래전에 잊힌 시집
이제는 표지색도 다 닳아 지워져가는 그것이
안주인 된장국마냥 뜨끈하게 상한 속을 달래주는 것이었다
- 시집 <붉은빛이 여전합니까>에서, 2020 -
* 요즘 말로 웃픈 상황이다.
어찌보면 식탁 다리 밑받침은 양반이랄 수도 있다.
시집이 냄비 받침, 엿 바꿔 먹는 용도, 심지어 밑닦개로도 쓰이는 때도 있으니.
오늘날 시인과 시집의 처한 현실이 그대로 그려졌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조차도 시의 향기로 풀어낸다.
시집의 불행을 시의 맛으로 치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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