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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표로 쓴 체코 사랑, 드보르자크의 진심 세계를 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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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1회 작성일 25-02-02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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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보르작


교향곡 신세계로부터




브람스


현악4중주 ‘아메리카’

나라 상황이 말이 아니다. 비상계엄으로 촉발된 위기 국면이 해소되지 못한 채 경제는 그야말로 침체 일로다. 연말연시 특수는 기대조차 못했고, 환율이 급등하니 물가도 따라 오르고 가뜩이나 어려운 서민들의 생계를 더욱 힘들게 한다. 하지만 나쁜 일만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나라가 어려워지니 우리 삶에 국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되고 나라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니 말이다. 모두가 절로 애국자가 되는 기분이다.


나라 사랑은 종종 음악이 만들어지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한다. 특히 나라가 어려울 때 더욱 그렇다. 오랜 분단을 종식하려고 베르디는 자신의 오페라에 이탈리아 통일의 열망을 담았고, 바그너는 국가적 정체성이 없이 살아가던 독일인에게 신화적이고 영웅적인 독일 정신을 불어넣었다. ‘러시아 5인조’는 자국민들이 문화적 정체성을 잃어갈 때 러시아 고유의 정서를 담은 음악 전통을 새롭게 구축했다. 노르웨이의 그리그도, 핀란드의 얀 시벨리우스도 마찬가지이다.


체코가 자랑하는 국민 작곡가 안톤 드보르자크의 경우도 그렇다. 그가 살았던 당시 보헤미아 공국이었던 체코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속국 신세였고 나라 잃은 설움은 그의 음악적 원천이 되었다. 그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친 작곡가는 체코 민족 음악의 아버지인 베드르지흐 스메타나이다. 프라하 봉기에 직접 참가하면서 민족의 소리에 눈을 뜬 스메타나는 드보르자크의 롤모델이었고 드보르자크는 그로부터 체코 음악에 대한 열정을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스메타나가 민족 정서를 담아내기에 비교적 용이한 오페라, 민속 춤곡, 교향시 같은 장르에 집중했던 반면 드보르자크는 순수 체코를 담은 기악 음악에 열중했다는 차이는 있지만.


음악가로서 그의 첫 시작은 초라했다.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그는 현악 5중주와 현악 4중주를 잇달아 작곡했고 야심차게 교향곡 작곡에도 도전한다. 하지만 처음으로 시도한 교향곡은 스스로 만족하지 못해 악보를 파기해버렸고 재도전한 두 번째 교향곡은 연주의 기회를 얻지 못해 서랍 속에서 썩는 신세가 되었다. 그가 자신의 작품을 대중에게 선보일 기회는 31살이나 되어서야 찾아왔다. 1872년 11월 프라하의 한 연주단체가 ‘피아노 5중주’를 음악회에서 연주한 것인데, 평단의 평가가 꽤 좋았다. 덕분에 몇 달 후 그의 ‘백산의 후계자들’이라는 애국적 내용의 칸타타를 프라하의 한 대규모 합창단이 연주하게 되었고, 이것이 평론가들은 물론 청중들로부터도 열광적인 반응을 얻음으로써 드보르자크는 대중에게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뚜렷이 각인시킨다. 하지만 체코를 벗어나는 순간 그는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무명 작곡가였고, 자신의 경력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펼쳐 나가기 위해서는 제국이 운영하는 예술가 지원 기금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래서 절박한 마음으로 기금 지원을 신청했으나 현실적으로 그가 선택될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운이 좋게도 그해에 빈 최고의 작곡가 요하네스 브람스가 심사위원으로 새롭게 참여했고, 19세기에 새로 등장한 표제음악보다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 같은 전통적인 절대음악을 추구하던 브람스는 드보르자크의 작품에 주목하게 된다. 선율적 소재나 리듬과 박자를 다루는 방식에 있어 그의 작품이 매우 창의적이고 감각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드보르자크가 피아노조차 갖지 못한 빈한한 음악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브람스는 그에게 더 큰 호감을 갖게 되었고, 변방 출신인 드보르자크가 기금을 받을 수 있도록 힘을 써주었다. 세상에는 남이 잘되는 것을 시기하고 방해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가끔은 인재를 발굴해서 도와주는 것을 즐거움으로 아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브람스가 그런 사람이었다. 브람스의 호의는 기금이라는 재정적 지원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전담하여 출판하고 있는 짐로크 출판사에 드보르자크를 소개해 그의 작품이 음악계에 널리 알려지도록 도왔다. 그뿐 아니라 자신이 몇 해 전에 ‘헝가리 무곡’을 작곡해 크게 히트시킨 것처럼 드보르자크에게도 고향의 민속 음악을 녹여낸 ‘슬라브 무곡’을 작곡할 것을 권유했는데, 그것을 받아들여 작곡한 이 작품들은 출판되자마자 엄청난 돌풍을 일으켰다. 덕분에 드보르자크라는 이름은 체코를 넘어 세계적으로 커다란 유명세를 탔다.


특히 런던에서 그의 인기는 대단했는데 ‘스타바트 마테르’ 공연이 가져온 긍정적 여파였다. 그런 런던 청중을 위해 드보르자크는 ‘교향곡 7번’을 작곡하고 그곳에서 초연했는데, 이후에도 9번이나 영국에 초대되어 자신의 작품을 직접 지휘하기도 했다. 러시아에도 이름이 알려져서 이번에는 러시아로 초청을 받아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1891년에는 케임브리지대에서 명예학위를 받았고 그 후 프라하 음악원 교수로 초빙을 받았다. 


오스트리아 상원 의원으로 임명되기도

그의 국제적 명성은 미국에서 그 정점을 찍는다. 1892년 드보르자크는 뉴욕시 국립 음악원 음악감독이 되어 미국에 갔는데, 그가 받은 연봉은 프라하에서 받던 연봉의 25배로 이례적으로 높은 연봉이었다. 그는 주로 백인 남성에게만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던 관례를 깨고 서버라는 여성을 제자로 받아들이는 파격을 단행하기도 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그는 미국 민족음악의 영감은 흑인의 선율이나 아메리카 원주민의 노래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진정한 민족음악은 민중들의 오랜 전통에서만 나오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자신도 흑인 노예들의 블루스와 흑인 영가와 인디언 선율을 찾아 듣고 공부하면서 이들 민족음악을 5음 음계 선율, 당김음 리듬, 지속저음, 변격종지와 같은 서양음악의 언어로 정리하는데 성공한다. 교향곡 ‘신세계로부터’와 현악4중주 ‘아메리카’는 그러한 노력 끝에 탄생한 위대한 걸작이다. 


교향곡 ‘신세계로부터’는 카네기홀 초연에서 청중의 엄청난 환호를 받았지만, 이 작품에 녹아있는 흑인과 아메리카 원주민 음악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인종차별이 당연한 것으로 버젓이 자행되던 시대였으니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이 곡에는 미국적인 것 만큼이나 체코의 울림이 강하게 느껴진다. 아마 고향에 대한 향수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실 그의 고국 보헤미아는 물론이고 유럽에서는 여전히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브람스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를 유럽 음악계에 데뷔시켰던 브람스는 그가 미국에 있는 동안에도 늘 도와주었고 심지어 유럽에서 출판되는 작품의 교정을 봐주기까지 했다. 그래서였을까. 미국에 정착할 것만 같았던 드보르자크는 3년 만에 유럽으로 돌아온다.


유럽으로 귀환하면서 그는 빈에서 살지 프라하에서 살지를 두고 고민이 많았다. 음악 활동만 생각하면 빈에서 사는 것이 여러가지로 유리했으나 드보르자크는 체코를 선택했고 다시 프라하 음악원 교수로 부임했다. 자신의 삶과 음악을 지탱하는 정체성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그의 한결같은 체코 사랑 덕이었는지, 그 후 그에게는 좋은 일들이 많아졌다. 젊은 시절 그렇게 절실했던 빈 예술가 기금의 심사위원이 되는 영예를 얻었고, 체코를 지배하던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황제 요제프 1세는 그에게 문화 예술 최고상을 수여했을 뿐 아니라 아예 그를 오스트리아 상원 의원으로 임명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호사다마랄까. 1904년 초 갑작스러운 건강 악화로 모든 활동을 중지해야 했고 잠시 병세가 호전되는 듯했으나 심장마비와 뇌졸중이 겹쳐 결국 5월 1일에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국장으로 거행되었고, 유해는 그가 태어났고 생애 대부분을 보냈던 프라하의 비셰흐라드 묘지에 안장되었다. 체코를 사랑했고 체코의 뿌리를 담은 음악을 만들었던 그답게 그렇게 프라하에 영원히 누웠다.


드보르자크가 추구했던 체코의 음악이 유럽과 다른 나라에서 인기를 끌고 아메리카 인디언과 흑인 음악을 녹여낸 ‘신세계로부터’가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많은 사랑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모든 국가의 민속적 전통은 결국 인류의 보편적 정서에 어딘가 그 뿌리가 닿아 있기 때문이리라. 영화 ‘기생충’의 아카데미 수상 이유에 대해 가장 한국적인 것들이어서 오히려 가장 넓게 전 세계를 매료시킬 수 있었다던 봉준호 감독의 말처럼. 민은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08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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