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國誌] 2부 장강의 영웅들 (289) 제37장 오월(吳越) 전쟁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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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列國誌] 2부 장강의
영웅들 (289)
제37장 오월(吳越) 전쟁 (1)
초(楚)나라를 쳐부순
이후 오왕 합려(闔閭)의 명성과 위엄은 중원에까지 크게 떨쳤다. 합려(闔閭)는 천하가
손안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북방의 제(齊)나라와
남쪽의 월(越)나라다.
그 두 나라만 제압하면 오(吳)나라는
명실공히 중원의 3분의 2를 지배하는 패자(覇者)가 되는 것이다.
합려(闔閭)가 제나라를
염두에 둔 것은 다름 아니다.
제(齊)나라가 회수(淮水)를 사이에 두고 오(吳)나라 바로 정북쪽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나라만 굴복시키면
황하 근방의 노(魯)나라나 위(衛)나라, 정(鄭)나라 등은 자연 오나라 영향권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생각만 해도 짜릿한 일이었다.
어느 날, 합려(闔閭)는 신임 재상 오자서를 불러 물었다.
"북의 제(齊)나라를 먼저 도모하는 것이 좋겠소. 아니면 남쪽의 월(越)나라를 먼저 평정하는 것이 좋겠소?"
오자서(伍子胥)는
오랫동안 생각에 잠긴 끝에 대답했다.
"북입니다."
"어째서 그렇소?"
"남쪽의 월(越)나라는 해안선이 복잡하게 뒤얽힌데다가 산이 가로막혀 있어 일시에 도모하기 어렵습니다."
"이 곳을 치면 저 곳으로 도망치고, 저 곳을 치면 또 다른 곳으로 도망쳐 좀처럼 굴복시킬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오랜 세월을 두고 야금야금 정복해 들어가야 합니다. 반면........."
북쪽의 제(齊)나라는
임치성을 중심으로 완전히 자리가 잡혀 있다. 백성들도 공실의 명령에 충실히 따르고 있다. 비록 영토는 넓다고 하나 힘이 한 곳에 집중되어 있어 그 중심부만 제압하면 나머지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오자서의 말을 들은 오왕 합려(闔閭)는 공감이 가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어떻게
제나라를 제압하는 것이 좋겠소?"
이번에는 오자서의 대답에 망설임이 없었다.
"제(齊)나라는 최근 동방의 패자로 자처할 만큼 힘이 강대한 나라입니다. 지금은
죽었지만 재상 안영과 사마 전양저로 인해 나라도 안정되었습니다. 힘으로 맞서서는 결코 그들을 제압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중원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제나라와 우호를 맺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우호라고?"
"그렇습니다. 우리
오(吳)나라는 한 면이 바다요, 삼면이 적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우리 군사가 아무리 용맹하다 하더라도
세 적을 동시에 상대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초(楚)나라는 우리를 넘보지 못할 것이므로 당분간 안심해도 됩니다.
남은 것은 제나라와 월나라인데, 우리가 제나라와 우호를 맺으면
모든 힘을 남쪽으로 집중시킬 수가 있습니다. 신이 북쪽을 도모하자는 것은 제(齊)나라와 싸우자는 것이 아니라 제나라를 동맹국으로 삼자는 것입니다."
오왕 합려(闔閭)는
비로소 오자서의 말뜻을 알아챘다.
결국 오자서(伍子胥)는
월나라를 평정하여 남쪽 후방을 안정시킨 후 제나라를 길목으로 하여 중원을 제패하자는 것이었다.
"좋은 계책이오. 그런데
우리는 제(齊)나라와 아무런 교류가 없는데, 어떻게 그들과 우호를 맺는단 말이오?"
"세자 파(波)가 부인을 잃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왕께서는 세자 파를 언제까지
혼자 놔둘 작정이십니까?"
"제나라와 혼인을 맺자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제(齊)나라와는 교류가 없지만 사자를 보내어 청혼하면 결코
그들은 우리의 청을 거절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곧 우호를 맺는 첩경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합려(闔閭)는 추진력이
강한 왕이었다. 오자서의 간언을 듣자 즉시 대부 왕손락(王孫駱)을 제나라로 보내어 혼인을 청했다.
이 무렵 제경공(齊景公)은
나이가 이미 일흔이 넘었다.
늙고 쇠약해서 과거의 진취적이고 호방한 기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느닷없이 남방 오랑캐인 오(吳)나라가 청혼해오자 당황했다.
예전 같았으면 크게 화를 내며 청혼사를 꾸짖어 쫓아냈겠으나, 지금은
그런 패기가 사라졌다. 더욱이 지금 오(吳)나라는 바야흐로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지 않은가.
그는 신하들을 불러 물었다.
"오나라와 혼인하는 것이 어떠한가?"
대부분의 신하들이 침묵하는 중에 총신인 대부 여미(黎彌)가 아뢰었다.
"오(吳)나라는 초나라 수도를 점령할 만큼 강성한 나라입니다. 그들과 우호를
맺는 것이 유리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번 청혼을 거절하면 그들은 필시 대군을 몰고 임치를 향해 쳐들어올
것이 분명합니다."
제경공(齊景公)은
머릿속으로 불타는 임치성의 광경을 그려보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마침 그에게는 열다섯 살이 갓 넘은 어린 딸이 있었다. 늦게
얻은 딸이라 무척 사랑했다. 사람들은 그녀를 소강(少姜)이라 불렀다.
제경공(齊景公)은
소강을 오나라로 시집보내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나라에서 온 청혼사를 불러 승낙하는 말을 내렸다.
여러 차례 사신이 오간 끝에 마침내 소강(少姜)은 오나라 세자 파(波)에게
시집왔다. 그런데 소강은 나이가 너무 어렸다. 몸도 성숙하지
못했다. 밤이 되면 괴로웠다.
소강(少姜)은 풍속과
기후가 다른 낯선 남방 땅의 생활이 이만저만 고역이 아니었다. 틈만 나면 고국을 생각하며 울었다. 세자 파(波)가 위로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마침내 소강은 우울증에 걸려 병석에 눕게 되었다.
오왕 합려(闔閭)는
어린 새 며느리가 불쌍했다.
그녀가 늘 북쪽 고향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알고 북문 성루를 개조하여 호화스럽게 장식했다. 성문이름도 '망제문(望齊門)'이라고 고쳤다.
소강(少姜)은 매일
망제문 위로 올라가 북쪽 하늘만 바라보았다.
그러나 하늘만 쳐다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녀의 슬픔과 그리움은 날이 갈수록 쌓여갔다. 병세도 더욱 악화되었다.
끝내 소강(少姜)은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숨을 거두기 직전 소강은 남편인 세자 파(波)에게 부탁했다.
"제가 죽거든 우산(虞山) 꼭대기에 묻어주십시오."
우산은 오성 근처에 있는 산으로, 소강은 죽어서라도 제(齊)나라 쪽을 바라보고 싶었던 것이다.
소강(少姜)이 죽자
세자 파(波)는 합려의 허락을 받아 그녀를 우산(虞山) 위에 묻었다. 오늘날도
안휘성 상숙현 우산에 올라가면 제녀묘(齊女墓)가 있다. 소강의 무덤이다. 또 그 곁에 망해정(望海亭)이라는 정자가 서 있다.
그런데 세자 파(波)는
마음이 무척 여렸다.
소강을 무척 사랑했었던 것이다. 어린 아내가 죽자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그 또한 병들어 눕고 말았다.
얼마 안되어 세자 파(波)도
소강(少姜)의 뒤를 따라가듯 세상을 떠났다.
제37장 오월(吳越) 전쟁 (2)
졸지에 어린 며느리에 이어 세자 파(波)마저 잃은 오왕 합려(闔閭)는
침통했다.
하지만 그는 슬픔에 젖어 나라일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제 북쪽이 안정되었으니 월(越)나라를 치리라!"
합려(闔閭)는 이렇게
선언했다.
그런데 재상 오자서(伍子胥)가
반대하고 나섰다,
"아직 때가 아닙니다."
"어째서 때가 아니라고 하오?"
"안이 튼튼해야 밖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이제 막 세자를 잃었습니다. 세자는 나라의 앞날입니다. 먼저 후계를 정해놓은 뒤 월(越)나라를
쳐야 합니다."
합려(闔閭)는 일리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과인에게는 여러 아들이 있소. 누가 좋을 것인가?"
그보다 며칠 전이었다.
오자서(伍子胥)는
느닷없이 한밤중에 한 사내의 방문을 받았다. 합려의 아들이자 세자 파(波)의 친동생인 부차(夫差)였다.
- 공자께서 웬일이십니까?
부차(夫差)는 용모가
비범하고 기상이 출중하여 죽은 형과는 대조적이었다. 속으로 적지 않은 야심도 키우고 있었다.
이때 부차의 나이 26세.
한창 패기만만한 시절이었다.
- 나라의 앞일을 의논하고자 특별히 재상을 찾아왔습니다.
오자서(伍子胥)는
속으로 짐작했으나 모르는 척 물었다.
- 나라의 앞일이라니요?
- 세자이신 형님께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제 부왕께서는 조만간 새로 세자를 세우실 터인데, 형님이 돌아가셨으니
이제 이 나라 적자(嫡子)는 바로 나입니다. 적자가 세자가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재상께서는 부왕께 이 말 한마디만
해주십시오.
그 말을 남기고 공자 부차(夫差)는 돌아갔다.
'왕재(王才)다!'
오자서(伍子胥)는
부차가 제법 당차다고 생각했다. 기회를 엿보던 중 합려가 월나라 치는 일을 꺼냈을 때 그는 오히려 후계자
얘기를 꺼낸 것이었다.
여러 아들 중 누가 적임자이겠냐는 합려의 물음에 오자서(伍子胥)는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후계를 정하는 일은 적자라야 뒤에 어지러움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제 파(波) 세자가
세상을 떠났으니 바로 아랫동생인 부차(夫差) 공자가 적자입니다. 마땅히 부차(夫差) 공자를
후사로 세워야 할 것입니다."
합려(闔閭)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가 보기에 부차(夫差)는 어리석고 인자하지 못하오. 오나라 계통을 계승하지 못할까 두렵구려."
"부차는 신의가 있어 사람을 사랑할 줄 알며, 또한 매사에 적극적입니다. 우리 오(吳)나라는 바야흐로 중원으로 웅비할 날개를 펴는 중입니다. 이런 때에는 활달하고 기상이 출중한 분이 나라를 이어받아야 할 것입니다. 주저할
일이 아닙니다."
오자서의 적극적인 추천에 합려(闔閭)는 마음을 정했다.
"그대의 말을 좇기로 하겠소. 그대는 부차(夫差)를
잘 보좌해주기 바라오."
이렇게 하여 부차는 오나라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 날로 그는 오자서의 집으로 가서 감사의 절을 올렸다.
BC 497년 (오왕
합려 18년)의 일이었다.
그해 겨울, 뜻밖의 소식이 오(吳)나라에 전해졌다.
- 월왕 윤상(允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윤상은 오랫동안 월나라를 다스려온 명군이었다.
어린 나이에 임금에 올라 복잡하게 얽힌 해안선을 따라 흩어져 있는 여러 부족을 하나로 통합하여 명실공히
월(越)나라를 강대국으로 끌어올렸다.
남쪽 땅에서 양질의 쇠가 많이 나는 점을 이용해 주재료가 구리였던 병기를 철기로 바꾼 주인공이기도 했다.
월나라에 명검(名劍), 명장(明匠)이 많이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월왕 윤상의 적극적인 광산 개발
정책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윤상이 죽고 아들 구천(勾踐)이 월나라 왕위에 올랐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합려(闔閭)는
눈을 매처럼 번뜩였다.
"하늘이 내린 기회요.
윤상이 죽고 그 아들 구천(勾踐)이 새 왕에
올랐다고 하니, 지금즘 월(越)나라는 매우 어수선할 것이오. 이 틈을 타 월나라를 정벌하는 것이
어떻겠소?"
모든 신하들이 찬성하는데, 유독 오자서만은 고개를 저었다.
"비록 월(越)나라가 우리 나라에 지은 죄는 적지 않지만, 국상이 난 것을 기회로
군사를 일으킨다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일입니다. 남의 불행을 이용하여 나의 이득을 취하는 것은 참된
용기가 아닙니다. 때를 기다렸다가 후일 월(越)나라를 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합려가 주저하는 빛을 보이자 태재 백비(伯嚭)가 일어나 흔연히 말했다.
"월(越)나라는 우리나라와 이웃해 있으면서도 초나라와 가까이하며 번번히 우리의 배후를 노려왔습니다. 이제 윤상이 죽고 철없는 구천(勾踐)이 왕위에 올랐다 하니 월나라도 운이 다했음이 분명합니다."
"더 이상 망설일 일이 아닙니다. 나라의 존망에 관한 일을 앞에 놓고 어찌 참된 용기 운운하며 한가로운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이야말로 월(越)나라를
송두리째 없애버릴 절호의 기회입니다. 군사를 일으키십시오."
백비(伯嚭)가 눈에 불을 켜고
오자서의 말에 반대 의사를 표명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원래 백비는 초(楚)나라
망명객으로서 오자서의 천거에 의해 오나라 국정에 참여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초나라를 원수로
삼고 있었다. 초나라를 치는 일에는 의기가 투합됐다.
그런데 초나라 수도 영성 점령 이후 백비(伯嚭)의 마음속에는 다른 야망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어찌 오자서 혼자 오나라 국정을 좌지우지할 것인가.'
그는 자신의 영향력을 높이리라 마음먹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월(越)나라를
원수처럼 여기고 있는 합려의 비위를 맞춰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이기면 일등공신이요, 지면 그뿐인 것이다.
오자서와 백비의 의견이 대립되자 합려(闔閭)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역시 마음은 월(越)나라
정벌 쪽으로 쏠려 있었다. 잠시 생각한 끝에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세자 부차(夫差)는 오자서와 함께 도성을 지키라. 나는 백비, 왕손락, 전의 등과 함께 정병 3만을
거느리고 남문으로 나가 월(越)나라를 정벌하고 돌아오리라!"
제37장 오월(吳越) 전쟁 (3)
앞서도 언급했듯, 월(越)나라는 '어느 날 갑자기' 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홀연히 중국 역사 무대 위로 등장했다. 그 이전까지의 일은 전혀
알 수 없다.
다만 <사기>에
의하면 월나라 조상은 하왕조를 세운 우(禹) 임금의 자손이라고
되어 있다. 아마도 하왕조 때 회계 땅에 봉해진 모양이다.
회계(會稽)는 지금의
절강성으로, 중국 대륙 동남쪽 끝자락에 위치해 있다.
그 부족은 몸에 문신(文身)을
하였고, 머리를 짧게 잘랐다. 이는 대체로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의 풍습이다. 꽤나 원시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교통로가 확보되고 문화 유입이 활발해지면서 그들도 문명의 혜택을 보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철 제련법의 발달이 그들의 생활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바야흐로 철기시대를 연 것이며, 월(越)나라가 강대국이 되어 역사 무대 위로 등장하게 된 주인이 아닐까.
월(越)나라 하면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다. 물론 칼과 관계되는 일화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검객과 관련이 깊다. 월(越)나라에는 소위 명검이라고 하는 훌륭한 칼만 많이 생산된 것이 아니다. 그에 못지 않은 검객도 출현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여검객 월녀(越女)'다.
오나라, 월나라 역사 얘기를 담은 <오월춘추(吳越春秋)> 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월(越)나라에 아름다운 처녀가 살고 있었다.
월녀(越女)는 인적과
멀리 떨어진 숲 속에 살며 검술을 익혔다. 사람들은 모두 그녀의 신묘한 검술을 칭찬하였다.
이 소문은 널리 퍼져 월왕 윤상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윤상(允常)은 사자를
파견해 후한 예물을 주며 군사들에게 검술을 가르쳐달라고 그녀를 초청했다.
월녀(越女)는 월왕의
초빙에 응하여 도성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원공(猿公)이라고
하는 노인을 만났다. 원공이 월녀에게 말했다.
- 듣자하니 네가 검술에 뛰어나다고 하는데, 나와 한번 겨루어보자.
월녀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 제가 어찌 노선배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만, 한번 시험해보겠습니다.
이에 두 사람은 숲 속에 있는 대나무를 다듬어 칼의 대용품으로 삼아 대결하였다. 원공(猿公)이 먼저 월녀에게
공격을 가했다. 월녀(越女)는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몸을 움직이며 원공의 공격에 반응했다.
가늘고 짧은 대나무 끝을 뻗어 정확하게 원공의 대나무 칼 끝에 맞춘 것이다. 원공(猿公)은 더이상
공격할 수 없어 뒤로 물러나 다시 공격해 들어갔다.
이런 식으로 세 번씩 공수를 주고받았다.
마침내 월녀(越女)가
원공을 향해 공격했다. 원공은 그 공격을 당해낼 수없어 뒤로 물러나 훌쩍 높은 나무위로 뛰어올랐다. 별안간 원공(猿公)은
간 데 없이 사라지고 흰 원숭이만이 나뭇가지 위에 서서 길게 울부짖더니 홀연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 뒤 월녀(越女)는
궁으로 들어가 월왕을 만났다.
월왕은 장교 이상의 지휘관을 불러 월녀에게서 신묘한 검술을 배우게 하였고,
다시 장교들은 군졸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었다. 이때부터 월나라 군대의 검술은 열국 중
가장 높은 수준을 자랑하게 되었다.......
월(越)나라가 역사
무대 위로 나서자마자 강국으로 활약하게 된 것과 깊은 관련이 있는 일화다.
윤상에 이어 새로이 월왕에 오른 구천(句踐) 또한 검과 검술을 매우 즐겼음에 틀림없다.
1965년 호북성 강릉의 초묘(楚墓)에서 발견된 월왕구천지검(越王句踐之劍)이 바로 그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 월왕 구천(勾踐)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위기를 맞았다.
이듬해 봄, 북쪽 이웃 나라인 오나라 왕 합려가 3만 대군을 이끌고 월나라 땅으로 쳐들어 온 것이다.
구천(句踐)은 젊고
용맹이 출중한 사람이었다.
더욱이 그에게는 아버지 윤상 시대부터 벼슬을 살아온 유능하고 노련한 신하들이 많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범려(范蠡),
문종(文種), 제계영(諸稽郢), 영고부(靈姑浮), 주무여(疇無餘), 서안(胥犴) 등이었다.
이 중 특히 범려(范蠡)는
윤상 말년에 발탁한 대부로서, 나이는 젊었지만 국정 운영에 천부적이라 할 만큼 많은 재능을 지닌 인재였다.
월왕 구천(句踐)은
오군이 쳐들어온다는 급보를 접하자마자 중신 회의를 열었다. 대부 범려(范蠡)가 말했다.
"오나라가 우리의 국상(國喪)을 이용하여 군사를 일으킨 것은 정도(正道)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번 싸움에 이길 것입니다. 더욱이 오나라는 손무가 은퇴하였으므로 두려워할 사람은 오직 오자서뿐인데, 그 오자서마저 오성(吳城)에
그냥 남아 있습니다."
"왕께서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마시고 취리(檇李) 땅으로 나가 오군을 맞아 싸우십시오."
범려의 말에 월왕 구천(句踐)은
힘이 솟았다. 곧 방어군을 편성했다.
- 제계영(諸稽郢)은 대장이 되고, 영고부(靈姑浮)는 선봉장이 되라.
- 주무여(疇無餘)와 서안(胥犴)은 좌우익이
되어 과인을 보좌하라.
아울러 대부 범려를 군사(軍師)로
삼아 군사 3만을 이끌고 오군을 맞아 싸우러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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