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國誌] 2부 장강의 영웅들 (270) 신포서(申包胥)의 피눈물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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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권 오월춘추 제 35장 신포서(申包胥)의 피눈물 (2)
그 날 밤이었다 투신(鬪辛)은 투소와 함께 초소왕을 모시고 잤다. 자정이 지났을까. 사위가 조용한데 문득 어디선가 숫돌에 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투신(鬪辛)은 의심이 나서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보았다. 이게 웬일인가. 동생 투회가 성난 얼굴로 시퍼렇게 날선 칼을 달빛에 비춰보는 중이 아닌가. 투신이 기겁하여 물었다.
"너는 그 칼로 무엇을 할 작정이냐?"
투회(鬪懷)가 결연한 어조로 대답했다.
"왕을 죽일 작정이오."
"네가 어찌 그런 생각을 품느냐?"
"지난날 우리 아버지는 초평왕(楚平王)에게 충성을 다했소. 그런데도 초평왕은 비무극(費無極)의 참소를 곧이듣고 우리 아버지를 죽였소. 나는 이제 초평왕의 아들을 죽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 하오."
투신(鬪辛)이 화를 내며 동생을 꾸짖었다.
"네 무슨 망발을 지껄이느냐? 임금은 하늘과 같다. 하늘이 사람에게 불행을 주었다 해서 감히 하늘을 원수로 삼겠느냐!"
"백성이 있고, 신하가 있어야 왕이오. 백성을 죽이고 신하를 죽이는 왕은 왕이 아닙니다. 나는 왕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죽이려는 것이오."
"동생은 들어라. 원수가 죽으면 원수를 못 갚는 법이다. 즉 원수는 그 자손에까지 이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왕께선 선왕의 잘못을 통탄하시어 우리 형제에게 벼슬까지 주셨다. 지금 우리 형제가 위기에 빠진 왕을 죽인다면 누구보다도 하늘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만일 그 못된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면 내가 먼저 너를 죽이리라!"
투신의 강한 반대에 투회(鬪懷)는 칼을 거두고 투덜거리며 대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초소왕(楚昭王)은 잠결에 바깥에서 다투는 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틈으로 내다보니 자신의 생사를 놓고 형제간에 옥신각신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투회가 생각을 바꾸어 칼을 거두긴 하였으나 초소왕은 더 이상 그 곳에 머물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다음날, 날이 밝자 초소왕(楚昭王)은 투신과 투소를 불러 다른 곳으로 갈 뜻을 밝혔다. 일행은 의논한 끝에 수(隨)나라로 달아나기로 결정했다. 수나라는 초나라 속국으로 지금의 호북성 수현 일대다.
국성(國姓)은 희(姬).
주왕실의 피가 흐르고 있다. 그러나 일찍이 초나라의 무력에 굴복하여 초나라 속국이 되었다.
한편, 노복강에 진을 치고 오군의 침공을 저지하려던 공자 신(申)은 뒤늦게 영성이 함몰되고 초소왕이 달아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백성들이 동요할까 두려웠다. 백성들이 나라를 버리고 달아나면 초(楚)나라는 재기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왕의 옷을 입고 왕이 타는 수레를 타고 초소왕 흉내를 내었다.
- 초나라 용사들이여. 나와 함께 오군을 무찌르자.
가짜 초소왕이 된 공자 신(申)은 비설 땅에 조정을 차려 백성들을 안심시켰다. 비설(脾洩)은 영성 부근의 작은 읍으로, 지금의 호북성 강릉시 근처다. 이 때문에 영성 일대의 백성들은 모두 비설 땅으로 피신해왔다.
그런 중에 초소왕이 수(隨)나라에 머물러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제야 공자 신(申)은 백성들에게 자신이 가짜 왕인 것을 알리고 그들과 함께 수나라로 들어가 초소왕을 알현했다. 오나라 침략으로 인해 벌어진 웃지 못할 일화 중 하나이다.
초평왕의 시체를 꺼내 구리 채찍으로 3백 대를 후려친 오자서(伍子胥)는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 기어코 초(楚)나라를 멸망시키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초소왕을 사로잡아 죽여야 했다.
오왕 합려에게 다시 청했다.
"초왕을 잡지 못하는 한 초(楚)나라는 멸망한 것이 아닙니다. 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일대를 뒤져 초왕을 잡아오겠습니다."
합려(闔閭)는 허락했다.
그때부터 오자서의 초소왕 수색 작전은 시작되었다. 오자서(伍子胥)는 며칠을 수소문한 끝에 초소왕이 수(隨)나라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편지를 써서 수나라 임금에게 보냈다.
수(隨)나라는 보내 주나라 자손이었지만, 운수가에 살면서 여러 대 동안 초나라의 괴롭힘을 받아왔습니다. 이제 하늘이 오나라를 도우사 초(楚)나라에 벌을 내렸습니다. 군후께서는 초왕을 잡아 압송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오(吳)나라는 운수 일대의 땅을 수나라에 다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수(隨)나라는 초나라 속국이 된 지 워낙 오래 되었기 때문에 초나라의 한 고을이나 마찬가지였다. 수후(隨侯)는 오자서의 편지를 받자마자 초나라 신하들에게 내보였다.
"오자서에게서 이런 편지가 왔소이다. 어찌하면 좋겠소?"
공자 결(結)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제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저는 우리 왕과 얼굴이 흡사하게 생겼습니다. 제가 가짜 왕이 되어 오자서에게로 가겠습니다."
공자 결(結)은 초소왕과 이복형제간이었으나, 희한하게도 쌍둥이처럼 얼굴이 비슷했다. 그래서 이따금씩 신하들도 착각할 정도였던 것이다.
수나라 임금은 공자 결(結)의 그러한 각오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기왕 초나라를 도와줄 바에 굳이 사람을 희생시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오. 내가 알아서 오자서에게 답신을 낼 터이니, 그대들은 초왕(楚王)을 잘 보호하여 숨어 있으시오."
그러고는 말 잘하는 신하를 불러 오자서에게로 가 말을 전하게 했다.
- 우리 수(隨)나라는 대대로 초나라와 친한 사이외다. 일찍부터 동맹을 맺은 처지이기에 망명 온 초왕을 영접한 것이오. 그런데 초왕(楚王)은 자기 때문에 수나라가 곤욕을 당할까 염려하여 이미 다른 나라로 떠나가버렸소이다. 그러니 장군은 다른 나라에 수소문해보시오.
수나라 임금의 말을 전해 들은 오자서(伍子胥)는 혼란에 빠졌다.
'이상하군. 초왕이 수(隨)나라를 떠났다면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혹 낭와를 따라 정(鄭)나라로 간 것이 아닐까?
정나라라면 오자서(伍子胥)가 한때 망명하여 숨어 있던 곳이다.
그러나 좋은 기억이 남아 있지는 않다. 자신이 모시던 세자 건(建)을 죽인 나라가 바로 정(鄭)나라였다. 그로 인해 오자서의 피눈물나는 도주 행각이 시작되지 않았던가. 새삼 분노가 치솟았다.
'그렇다. 이 기회에 초왕도 잡고 세자 건(建)의 원수도 갚아야겠다.
오자서(伍子胥)는 군사를 거느리고 정나라를 향해 쳐들어갔다.
이 무렵, 정나라 군주는 정헌공(鄭獻公)이었다.
명재상 자산(子産)에 이어 국정을 돌보던 유길(遊吉)도 죽은 후였다. 정헌공은 정정공 대에 있었던 세자 건(建)의 주살 사건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오자서가 순순히 물러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이 모든 게 초(楚)나라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망명 와 있는 초나라 영윤 낭와를 불러 협박했다.
"그대가 우리 나라에 와 있기 때문에 우리 정(鄭)나라도 위험지경에 빠졌다. 그대는 어찌할 생각인가? 스스로 오자서에게로 갈 것인가. 아니면 내가 잡아 오자서에게 넘길 것인가. 그대가 알아서 판단하라."
낭와(囊瓦)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음을 비관한 끝에 객사에서 목을 매고 자살했다.
정헌공(鄭獻公)은 낭와의 시체를 거두어 오자서에게 내주며 말했다.
"초왕은 우리 나라에 오지 않았소. 대신 영윤 낭와의 시체를 보내니, 그대는 더 이상 우리 정(鄭)나라를 핍박하지 마오."
그러나 오자서(伍子胥)는 물러가지 않았다.
계속 신정성을 향해 육박해 들어갔다.
오자서(伍子胥)가 계속 신정성을 향해 육박해오자 정헌공(鄭獻公)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신하들이 소매를 걷어붙이며 간했다.
"이젠 별 도리 없습니다. 오군과 싸워 이기건 패하건 양단간에 결정을 지어야 합니다."
정헌공(鄭獻公)은 고개를 저었다.
"정나라와 초나라 중 어느쪽이 강한가? 오나라는 초군도 무찔렀는데, 우리가 어찌 그들을 이길 수 있겠는가?"
그러고는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백성들에게 널리 영을 내렸다.
능히 오(吳)나라 군사를 물러가게 하는 자가 있다면, 과인은 그 사람과 더불어 이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리라.
거리마다 이런 방문이 나붙은 지 며칠이 지나서였다.
한 젊은어부가 정헌공을 만나뵙기를 청해왔다.
정헌공(鄭獻公)이 불러들여 물었다.
"그대는 무슨 일로 나를 찾았느냐?"
젊은 어부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신이 능히 오(吳)나라 군사를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얼마의 군사와 병차가 필요한가?"
"군사도 병차도 필요 없습니다. 다만 신에게 배 젓는 노 하나만 주십시오. 그러면 신이 오군을 물러가게 하겠습니다."
정헌공(鄭獻公)은 젊은 어부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쩌랴. 그밖에 다른 방법이 없질 않은가. 정헌공은 신하를 시켜 배 젓는 노 하나를 그에게 내주었다.
"그대가 오자서(伍子胥)를 물러가게 해준다면 내 어찌 큰 상을 아끼리오!"
젊은 어부는 신정성을 나와 오군이 머물러 있는 곳으로 갔다. 영채 앞에 이르러 주저앉아 노를 두드리며 노래 부르기 시작했다.
갈대 속에 숨은 사람아. 갈대 속에 숨은 사람아.
허리에는 일곱 개 별이 박힌 보검을 찼구나.
그대는 강물을 건너던 때의 일을 잊었는가.
보리밥과 생선국으로 주린 배를 채웠구나.
오(吳)나라 군사들은 영문 밖으로 달려나와 젊은 어부를 잡아다 오자서 앞으로 끌고 갔다. 그는 오자서 앞에 이르러서도 연신 '갈대 속에 숨은 사람아'를 불러댔다.
노래 가사를 듣고 있던 오자서(伍子胥)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물었다.
"그대는 누구냐?"
젊은 어부는 노래를 그치고 오자서에게 배 젓는 노를 들어보였다.
"장군께서는 이 노가 생각나십니까? 저는 바로 저현(滁縣) 땅에 사는 고기잡이 노인의 아들입니다."
오자서(伍子胥)는 감격과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젊은 어부의 손을 잡았다.
"그렇구나. 그대는 분명 고기잡이 노인의 아들이로구나. 그대의 부친은 나 때문에 죽었다. 나는 늘 은혜를 갚고자 했으나, 그 길을 알지 못해 한이었다."
"하늘이 도우사 오늘에야 그대를 만났도다. 그대가 노래를 부르며 날 찾아왔으니, 필시 내게 할말이 있겠구나."
그제야 젊은 어부는 찾아온 이유를 말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저는 아버지의 일을 이어받아 저하(滁河)에서 고기잡이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그런 중에 오나라와 초나라 사이에 큰 전쟁이 일어났고, 저는 정(鄭)나라 땅으로 피신해왔습니다."
"어느 날 성안으로 들어가보니 거리마다 방문이 붙어 있었습니다. '오나라 군사를 물러가게 하는 자가 있으면 큰 상을 내리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난날 제 선친께서 위기에 빠진 장군을 구해준 일이 있기에 이렇듯 찾아온 것입니다. 바라건대, 장군께서는 정(鄭)나라의 죄를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오자서(伍子胥)는 고개를 쳐들며 외쳤다.
"오호라, 오늘날 이 오자서가 있게 된 것은 다 그때의 고기잡이 노인이 나를 태워 강을 건네주었기 때문이다. 하늘이 푸르고 푸르거늘 내 어찌 그 은혜를 잊을 것인가. 그대는 안심하고 돌아가라. 내 그대의 소원을 들어주리라."
그러고는 그 날로 명령을 내려 정(鄭)나라 땅에서 군사를 물러가게 했다.
고기잡이 노인의 아들은 신정성으로 돌아가 오자서의 철군 사실을 정헌공에게 보고했다. 정헌공(鄭獻公)은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사방 1백 리의 땅을 식읍으로 내주었다. 그 후로 정나라 사람들은 그 젊은 어부를 '어대부(漁大夫)'라고 불렀다.
오늘날도 진(溱) 땅과 유(洧) 땅 사이에 장인촌(丈人村)이라는 마을이 있다. 그 곳이 바로 정헌공이 어대부에게 하사한 땅이다.
오자서(伍子胥)는 정나라 침공을 취소하고 초나라 국경지대로 돌아왔다.
모든 길목에 군사를 배치하고 미(麋) 땅에다 영채를 세운 후 흩어진 초나라 패잔병들이 항복해오기를 기다렸다. 동시에 초소왕(楚昭王)의 행방을 찾는 일에 전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오자서에게 뜻하지 않은 서신 하나가 날아들었다.
"신포서(申包胥)?"
반가웠다. 신포서라면 오자서의 오랜 친구로 죽마고우(竹馬故友)나 다름없다. 그가 초나라 땅을 벗어날 때 길에서 만난 이후로 한 번도 소식을 전해 듣지 못했다.
그때 헤어지면서 오자서(伍子胥)는 원한에 사무쳐 이렇게 말했었다.
-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초나라를 멸망시켜 아버지와 형의 원수를 갚겠네.
그러자 신포서(申包胥)는 이렇게 응대했었다.
- 그대가 초나라를 멸망시키려들면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초(楚)나라를 끝까지 지키겠네.
그때의 기억이 오자서(伍子胥)는 아직도 생생했다.
심부름 온 사람에게 물었다.
"신포서(申包胥)는 지금 어디 있는가?"
심부름 온 사람의 대답은 이러했다.
신포서는 오군에 의해 영성이 함락당할 때 초소왕과 함께 피신하지 못했다. 최후의 순간까지 영성을 지키려다가 오군이 밀려드는 것을 보고서야 따로이 이릉 땅에 있는 석비산(石鼻山)으로 피신했다.
그 후 초소왕에게로 가기 위해 행방을 수소문하다가 오자서(伍子胥)가 초평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그 시체에 채찍 3백 대의 형벌을 가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신포서(申包胥)는 탄식했다.
- 심하도다. 오자서가 기어코 초나라를 멸망시키려들 작정인가?
그러고는 붓을 들어 오자서에게 편지를 쓴 것이었다.
오자서는 신포서의 편지를 뜯어보았다. 그 내용은 매우 신랄했다.
그대는 원래 초나라 신하로서 한때는 초평왕(楚平王)을 섬기기도 했네. 그런데 어찌 왕의 시체를 무덤 속에서 꺼내 시체에 매질을 하고 눈알까지 뽑을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대의 행동은 너무 잔혹한 일이었네.
대저 천하의 이치는 차면 쇠퇴하는 법이네.
때로 사람이 승하면 하늘을 때려부수는 비도(非道)를 감행하기도 하지만, 천도(天道)가 바로 정해지면 비도를 감행한 사람은 반드시 천벌을 받게 되네.
나는 그대의 소식을 듣고 슬픔과 비탄을 금할 수가 없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속히 군사를 거두어 오(吳)나라로 돌아가게.
만일 그렇지 않으면 지난날 내가 맹세했던 거와 같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오군을 무찌르고 초나라를 구할 것일세.
옛 친구의 마지막 충고이네.
신포서의 편지를 읽어본 오자서(伍子胥)는 침통했다.
그는 하늘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가 심부름 온 사람에게 말했다.
"내가 바빠서 답장은 쓰지 못하겠다. 돌아가서 신포서에게 나의 말을 전하라. '우선 초평왕(楚平王)의 일에 대해서는 사죄를 하는 바이네. 하지만 자네는 나의 마음도 알아줘야 할 것이네.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기 때문에 매사 도리에 어긋나는 짓을 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이다."
-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다.
오자서(伍子胥)가 남긴 말 중 가장 유명한 말이다. 한자성어로는 일모도원(日暮途遠)이다.
다시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 나는 이미 나이를 너무 많이 먹었다. 그러나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아직 많이 남았다. 어쩔 것인가. 초(楚)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을 제패한 후 원수를 갚아야 하는 것이 순리이겠지만, 그렇게 하자니 언제 세월이 나를 기다려줄 것인가. 그래서 나는 부득이 일을 거꾸로 하는 것뿐이다.
요즘도 할 일은 많으나 힘들고 지쳐 편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종종 입에 담는 말이다.
272
-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기 때문에 매사 도리에 어긋나는 짓을 할 수밖에 없다.
심부름꾼은 석비산으로 돌아가 신포서에게 오자서의 말을 전했다.
신포서(申包胥)는 오자서가 기어코 초나라를 멸망시키고야 말 작정인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나도 가만히 앉아서 초(楚)나라가 멸망하는 걸 기다릴 순 없다.'
신포서는 바위 위에 앉아 생각하기 시작했다. 초나라 힘만으로는 오군(吳軍)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타국의 도움을 받아야겠다!"
여러 나라들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제(齊)나라도 생각해보았고, 월(越)나라도 그려보았다. 그러나 모두 여의치 않았다. 거리가 멀거나 군사력이 약했다.
어느 순간 섬광 같은 것이 신포서의 뇌리를 스쳤다.
'그렇다. 진(秦)이다!'
진나라는 초나라 바로 북쪽에 있으므로 거리도 가까웠고, 서방의 패자답게 군사력도 강했다.
무엇보다도 진(秦)나라는 초(楚)나라와 대대로 친밀한 편이었다. 초평왕의 부인인 맹영 또한 진애공(秦哀公)의 딸이 아니던가. 초소왕(楚昭王)은 진애공의 외손자인 셈이었다.
'진으로 가 도움을 청하리라!'
그 날로 신포서(申包胥)는 석비산을 나와서 서북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오군에 패해 쫓겨온 몸이라 수레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도보로 길을 걸었다. 발이 부르트고 터져 발자국마다 피가 낭자했다.
그래도 신포서(申包胥)는 걷고 또 걸었다.
진(秦)나라로 향하는 길에 초소왕이 수(隨)나라에 숨어 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그는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진군(秦軍)을 데리고 와 왕을 모시리라.'
마침내 신포서(申包胥)는 진나라 도성인 옹성(雍城)에 당도했다.
공궁으로 들어가 진애공을 알현하고 도움을 청했다.
"오(吳)나라의 침공으로 군후의 외손자이신 우리 왕께서는 종묘사직을 잃고 초야에 숨어 계십니다. 바라건대 군후께선 우리 나라를 불쌍히 여기시고 군사를 일으키시어 오군을 쫓아내주십시오."
그런데 진애공(秦哀公)의 반응이 예상보다 냉랭했다.
"그대도 알다시피 우리 진(秦)나라는 서쪽 궁벽한 곳에 위치해 있어 이 나라를 지키기에도 힘에 겹다. 무슨 여유가 있어 남을 도와줄 수 있으리오. 그대는 먼 길을 왔으니 잠시 역관에 나가 편히 쉬라."
그러고는 신하 하나를 딸려 역관으로 내보내 음식과 술을 내주었다.
신포서(申包胥)는 초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지금 우리 왕은 초야에 숨어 전전긍긍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신하된 사람이 어찌 한시인들 편히 쉴 수 있겠습니까?
안내해준 신하를 통해 이렇게 호소하며 거듭 군사를 일으켜줄 것을 청했다. 하지만 그 날 이후로 진애공으로부터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신포서(申包胥)는 눈앞이 캄캄해왔으나 낙담하지 않았다.
이틀이 지나서 그는 결심했다.
' 이 나라에서 죽으리라.'
그는 의관을 벗어던지고 맨몸으로 역관을 나와 공궁으로 들어갔다.
뜰 앞에 섰다.
진애공(秦哀公)은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러나 신포서(申包胥)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 공궁 뜰 앞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밤이 되어도, 다시 날이 밝아도 그는 그 자리에 박힌 듯 서 있었다.
"초(楚)나라를 위해 군사를 일으켜주지 않으면 결코 물러가지 않겠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신포서(申包胥)는 여전히 뜰 앞에 서서 눈물을 뿌려댔다. 또 3일이 지나고 4일이 지났다. 이렇게 칠일칠야(七日七夜)를 물 한모금 마시지 않고 통곡하며 애걸했다.
마침내 신포서의 눈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피눈물이었다. 볼을 타고 흘러내린 피눈물은 그의 앞가슴을 붉게 적시었다.
신포서의 이 행동은 진애공의 귀에도 전해졌다.
그는 믿을 수가 없어 어느 날 밤 몰래 뜰로 나가보았다. 과연 신포서(申包胥)는 맨몸뚱이로 뜰 앞에 서서 붉은 피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진애공(秦哀公)은 형언하기 어려운 감동을 받았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듯했다.
"무서운 일이다. 신하가 임금을 생각함이 어찌 저리도 지극한가. 과연 우리나라에도 저와 같은 신하가 있을까. 초(楚)나라에 저런 신하가 있는데 어찌 초나라가 멸망할 것인가."
진애공(秦哀公)은 벅차오르는 감동을 억제하지 못하고 어둠 밖으로 몸을 드러냈다.
"신포서여, 신포서여."
느닷없는 외침 소리에 신포서(申包胥)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진애공이 눈앞에 서 있었다. 그는 땅바닥에 엎드리며 큰 절을 올렸다.
"군후께서 이 밤중에 웬일이십니까?"
진애공(秦哀公)은 가까이 다가와 신포서의 차디찬 손을 잡아 일으켰다.
"내가 이제야 신하 된 자가 임금을 생각하는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았소. 내 그대의 청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터이니 어서 옷부터 입도록 하시오."
"임금을 바로 모시지 못해 나라를 망하게 만든 죄인이 어찌 옷을 입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나라를 구하기 전에는 옷을 입지 않겠습니다."
신포서의 이러한 대답에 진애공(秦哀公)은 또 한 번 감동했다.
그는 신포서의 손을 잡은 채 노래를 한 곡 부르기 시작했다.
어찌 옷이 없다 하리오
그대와 함께 포(袍)를 입으리라.
군왕이 군사를 일으키니
나 또한 짧은 창 긴창을 세우고
그대와 함께 원수를 갚으리라.
어찌 옷이 없다 하리오
그대와 함께 속옷을 입으리라.
군왕이 군사를 일으키니
나 또한 긴창 가지창을 세우고
그대와 함께 원수를 갚으리라.
진(秦)나라 노래는 대체로 굳세고 힘차다.
전투적인 것을 즐겼다. 이 노래 또한 군사들의 사기를 돋우는 군가 풍이다. 제목은 '무의(無依)'라고 하며, <시경(詩經)>의 <진풍(秦風)> 편에 수록되어 있다.
진애공(秦哀公)은 이 노래를 부름으로써 신포서의 요청을 수락했다고 볼 수 있다.
신포서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칠일칠야 동안의 피눈물이 아닌 감격의 눈물이었다.
그는 진애공의 노래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깊게 머리를 조아렸다. 그런 후 함께 내궁으로 들어가 옷을 입고 비로소 음식을 입에 대었다.
다음날, 진애공(秦哀公)은 모든 신하를 불러놓고 초나라를 위해 군사를 일으킬 것임을 선포했다. 공자 포(蒲)와 공자 호(虎)를 대장으로 임명하고 병차 5백 승을 내주었다.
신포서(申包胥)는 신바람이 났다. 두 대장을 찾아가 따로이 상세히 설명했다.
"지금 우리 왕께서는 수(隨)나라에 계십니다. 내가 먼저 수나라로 가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릴 터이니, 두 장군께서는 상곡 땅을 경유하여 동쪽으로 진군하십시오."
"그러면 닷새 후에 양양 땅에 당도할 것입니다. 그 사이 저는 수(隨)나라에 집결해 있는 초군을 모아 양양으로 가겠습니다. 양군이 협력하여 오군을 치면 어찌 승리를 거두지 않겠습니까."
그러고는 수레를 몰아 수나라를 향해 달려갔다.
마침내 신포서(申包胥)는 수나라에 당도하여 초소왕을 알현했다.
신포서에게서 그간의 얘기를 들은 초소왕의 기쁨은 이루 헤아릴 수없이 컸다.
"이제야 우리가 사직을 되찾을 수 있겠구나."
이 무렵 초나라 장수 원연과 송목 등은 패잔병을 수습하여 2만에 가까운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들은 신포서의 지시에 따라 곧장 양양으로 향했다. 수(隨)나라 군사도 이에 합세했다.
진(秦)나라 구원군은 약속한 날짜에 정확히 양양 땅에 도착했다.
세 나라 장수들은 서로 반가이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은 군사들을 정돈하여 양양을 떠나 번수(樊水)를 바라보고 남하했다.
제 35장 신포서(申包胥)의 피눈물 (6)
초ㆍ진 연합군 또한 영성 탈환을 위한 계책을 의논하느라 한창이었다.
공자 신(申)이 진나라 장수들에게 말했다.
"오군(吳軍)은 지금 영성을 본거지로 삼고 있기 때문에 수비가 매우 견고할 것이오. 여기에 당(唐)과 채(蔡)나라 군사들이 합세하면 영성을 탈환하기는 커녕 오히려 우리가 고립되고 맙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당나라부터 쳐서 없애버립시다. 당(唐)나라만 격파하면 채(蔡)나라는 겁이 나 감히 군사를 움직이지 못할 것이오. 그래야 우리가 마음놓고 오군을 상대할 수 있소."
전날 당나라와 채나라가 오나라를 도운 데 대한 보복 조치이기도 했다.
진군 장수 공자 포(蒲)가 무릎을 쳤다.
"기발한 생각이외다."
이렇게 해서 초ㆍ진 연합군은 영성으로 향하다 말고 당나라로 군사를 돌려 당성(唐城)을 공격했다.
졸지에 기습을 받은 당성공(唐成公)은 손 한 번 써보지 못하고 사로잡혀 목이 잘리었다. 이로써 당나라는 멸망했다. 오군이 영성을 점령한 이듬해인 BC 505년(초소왕 11년) 여름의 일이었다.
아니나다를까.
당성공의 죽음 소식을 들은 채소공(蔡昭公)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합려로부터 원군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감히 군대를 보내지 못했다.
이에 초ㆍ진 연합군은 마음놓고 영성을 향해 내려갔다.
영성 수비를 책임진 오왕 합려의 동생 부개(夫槪)는 용맹스럽기도 하였지만 자부심 또한 대단했다. 그는 자신이 영성 함락에 가장 큰 공을 세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번 직(稷) 땅 싸움에서의 패배로 인해 그의 입지는 크게 약화되었다. 손무(孫武)가 자신에게 영성 수비를 맡겼을 때 그는 속으로 불만이 많았다.
'선봉 대장인 나에게 가장 후방인 영성 안에 틀어박혀 있으라니!'
그러나 패장(敗將)으로서 대놓고 불만을 터뜨릴 수가 없었다.
합려와 여러 장수들이 각기 맡은 성으로 떠나가고 나자 부개(夫槪)는 더욱 불쾌하고 우울했다. 당장에라도 군사를 몰고 나가 초ㆍ진 연합군과 다시 한 번 붙어보고 싶었다.
실제로 그는 군사들을 소집했다.
"나가 싸우리라!"
조카이자 합려의 아들인 공자 산(山)이 만류했다.
"숙부께서는 어찌하여 왕의 명령을 어기려 하십니까?"
"조카는 염려하지 마라. 내가 단번에 초와 진나라 군사들을 격파하고 돌아올 것이니."
부개(夫槪)는 자신 소속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영성 문을 나섰다. 그런데 성문을 지나면서 문득 그의 머릿속으로 엉뚱한 생각이 스쳐갔다.
'우리나라는 대대로 왕이 죽으면 동생이 왕위를 계승해왔다. 그런데 지금 왕인 형님은 자신의 아들인 파(波)를 세자로 세웠다. 이는 내게 왕위를 넘기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번에 우리 나라 군사가 모두 초(楚)나라를 치러 나왔기 때문에 지금 오성은 텅 비었을 것이다.'
'내가 이대로 본국으로 돌아가 왕위에 오른다면, 다음날 왕위 때문에 다투지 않아도 된다. 지금이 바로 그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이런 그의 망상은 한수 강변에 이르러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강가에서 서서 한참 동안 강물을 바라보던 부개(夫槪)는 마침내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한수를 건너 본국으로 돌아간다. 나를 따르는 자는 부귀영화를 함께 누리리라!"
그들은 신속히 달렸다.
마침내 오나라 국경 안으로 들어섰다.
부개(夫槪)는 부하들을 시켜 거짓말을 퍼뜨렸다.
- 합려는 진(秦)나라 군대와 싸우다가 전사했다. 이제 내가 형님 대신 이 나라 왕위에 오르겠다.
그러고 나서 부개는 스스로 오왕이라 칭했다. 아들 부장(扶臧)을 불러 후미를 맡겼다.
"너는 회수 강변에 머물며 합려가 돌아오는 길을 막아라."
오나라 도성 주변은 어수선했다.
유언비어가 끊임없이 나돌았다.
민심이 급격히 불안해졌다.
오나라에 남아 도성을 지키던 세자 파(波)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정확한 소식을 알아내기 위해 매일같이 사람을 보내 조사했은 좀처럼 진위 여부를 판단할 수 없었다. 그러할 때 부개(夫槪)가 군사를 거느리고 오성 밑에 당도했다.
"조카는 속히 성문을 열어라. 왕께서는 이미 전사하셨다. 숨을 거두시기 전에 나에게 왕위를 물려주셨다."
세자 파를 보좌하던 대부 피이(被離)가 황급히 말했다.
"부개 공자는 반역할 상입니다. 그의 말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좀더 사태를 알아본 후 그를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세자 파(波)는 성 위로 올라가 아래를 굽어보며 소리쳤다.
"왕께서 전사하셨다면, 손무나 오자서 등 나머지 장수들은 어찌 되었습니까? 나는 이미 숙부의 불순한 마음을 알고 있습니다. 성문을 열어드릴 수가 없으니, 숙부는 어서 영성으로 돌아가 왕께 죄를 청하십시오."
부개(夫槪)는 화가 치밀어올랐다.
부하들에게 성을 공격하라 명했다. 그러나 오성은 오자서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 쌓은 성이다.
5천 명의 군사로는 쉽게 깨뜨릴 수 없었다. 거기에 성벽 위에서 화살이 빗발처럼 쏟아져 내렸다. 부개는 하는 수 없이 성 50리 밖으로 물러나 대채를 내렸다.
그 날 밤 그는 심복 부하를 뽑아 월(越)나라로 보냈다.
월왕 윤상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었다. 사자는 삼강(三江)을 건너 월나라로 가서 부개의 말을 전했다.
- 원군을 보내주십시오. 오성을 함락시키는 날엔 우리나라 다섯 성을 귀국에게 바치겠습니다.
부개(夫槪)가 제시한 조건에 구미가 당긴 월왕 윤상(允常)은 지체하지 않고 군사동원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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