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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列國誌] 2부 장강의 영웅들 (275) 신포서(申包胥)의 피눈물 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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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4회 작성일 23-02-18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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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5장 신포서(申包胥)의 피눈물 (7) 


그 해 7월.

기남성에 진을 치고 있는 오왕 합려에게 연이어 급보가 날아들고 있었다.

- 당(唐)나라가 초군의 기습을 받고 멸망했습니다.

- 채(蔡)나라가 초나라의 기세에 눌려 원군 보내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오자서(伍子胥)도 그 소식을 듣고 기남성으로 달려왔다.

외부로부터의 원군이 차단당했다는 것은 곧 영성을 중심으로 한 기남성, 맥성 등의 고립을 뜻하는 것이다. 예삿일이 아니었다.

손무와 오자서가 합려와 마주앉아 대책을 의논하는 중에 또 하나의 심상치 않은 보고가 들어왔다.

"무엇 때문인지 공자 부개(夫槪)가 자신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오(吳)나라로 돌아갔습니다."

보고를 보내온 것은 부개와 함께 영성 수비를 책임진 공자 산(山)이었다.

합려(闔閭)가 부개의 귀국의 의미를 알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오자서가 대뜸 말했다.

"부개 공자가 돌아간 것은 필시 반역하려는 뜻에서일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합려로서는 설상가상(雪上加霜)이었다.

합려(闔閭)는 금세 얼굴이 어두워졌다. 한편으로는 분노의 기색이 피어올랐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좋겠소?"

"부개(夫槪) 공자는 한갓 필부의 용기밖에 없습니다. 별로 염려할 바 아닙니다. 다만, 이 기회에 월(越)나라가 군사를 일으키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왕께서는 속히 본국으로 돌아가셔서 내란을 진압하십시오. 서두르지 않으면 후회합니다."

합려(闔閭)는 긴가민가 하면서 오자서의 말에 따랐다.

손무와 오자서가 영성에 남아 초. 진 연합군을 상대하기로 했다.

합려(闔閭)는 백비만을 데리고 배를 타고 강물을 따라 내려갔다. 그들이 하류에 이르러 한수를 건넜을 때였다. 합려는 세자 파(波)가 보낸 사자와 만났다. 사자는 서둘러 오성 소식을 전했다.

"부개(夫槪) 공자가 반역을 했습니다. 그는 왕이라 자칭하고 월(越)나라와 내통했습니다. 지금 월나라 군사들이 도성을 향해 달려오고 있습니다."

합려(闔閭)는 경악과 함께 크게 분노했다.

"오자서의 말이 맞았구나. 설마했는데, 부개 이 놈이 나를 배신하다니......!"

이때부터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회수 이남의 예장 부근에 진을 치고 있던 부개의 아들 부장(扶臧)이 합려의 귀국을 방해하기 위해 군사를 몰고 내려왔다.

합려(闔閭)는 그와 싸울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군사들을 풀어 예장 일대에 수백 장의 방문을 붙이게 했다.

방문(榜文)의 내용은 이러했다.

나는 오왕 합려다.

부개를 따라 먼저 돌아온 장수나 군사들은 이 글을 보는대로 과인에게로 달려오라. 즉시 오는 자에게는 예전의 지위를 보장하겠지만, 조금이라도 늦게 오는 자는 추호의 용서도 없이 참하리라!

예장 일대에 포진하고 있던 부개의 군사들은 방문(榜文)을 보자 그 즉시로 창을 메고 합려에게로 투항했다. 반 이상 군사를 잃은 부개의 아들 부장(扶臧)은 싸울 마음을 잃고 몰래 군중을 빠져나와 곡양(谷陽) 땅으로 가 숨었다.

이로써 합려(闔閭)는 손쉽게 오강을 따라 오성 근처까지 진군할 수 있었다.

그 무렵, 부개(夫槪)는 오성 주변의 백성들을 징집하여 자기 군대에 편입시켰다. 월(越)나라 군사가 오는대로 합세하여 오성을 들이칠 작정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합려(闔閭)가 나타났다.

징집된 백성들은 합려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자 앞다투어 군중에서 달아났다. 남은 것은 본래의 자기 군사뿐이었다.

부개(夫槪)는 어쩔 수 없이 그 군사만으로 귀환하는 합려와 맞서 싸웠다.

합려(闔閭)가 부개를 향해 큰소리로 꾸짖었다.

"내가 너를 수족처럼 아끼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반역했느냐?"

"너 또한 요왕(僚王)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느냐? 나는 네 방법을 따랐을 뿐이다."

합려(闔閭)는 격노했다.

"백비는 나를 위해 저 역적놈을 사로잡아라!"

백비가 달려나가 부개의 군사를 들이쳤다. 부개(夫槪)가 백비를 상대하는 동안 합려는 대군을 이끌고 측면 공격을 시도했다.

양군은 한데 어우러져 싸웠으나 숫자상으로 비교가 되지 않았다.

한나절도 채 지나기 전에 부개(夫槪)는 대패하여 강변으로 달아났다.

마침 부개의 아들 부장(扶臧)이 강변 근처에 숨어 있다가 도망쳐오는 아버지를 발견했다. 그들은 함께 배를 타고 강을 건너 예장을 지나 송(宋)나라로 망명했다.

반란군을 진압한 합려(闔閭)는 백성들을 위로하며 오성으로 들어갔다.

세자 파(波)가 성문을 열고 나와 부왕 합려를 맞이해들였다. 그 기쁨이 채 사라지기 전에 세작이 달려와 보고했다.

- 월(越)나라 군사들이 우리 영토로 침범해 들어왔습니다.

합려(闔閭)는 자신의 힘으로 그들을 상대하기가 벅차다고 여기고 급히 사람을 보내 손무(孫武)와 오자서(伍子胥)에게 귀환령을 내렸다.

- 급히 귀국하라!

합려의 소환장을 받은 손무와 오자서는 은밀히 철군 준비를 서둘렀다.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회군을 발표하지 않았다. 잘못하다간 초. 진 연합군으로부터 퇴로를 차단당할 염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손무(孫武)가 말했다.

"이대로 돌아가기에는 아깝군요."

오자서가 막 대답하려고 할 때 수하 장수 하나가 들어와 고했다.

"초(楚)나라에서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오자서가 서신을 받아 겉봉을 보니 바로 신포서(申包胥)가 보낸 글이었다.

내용은 이러했다.

자네는 영성을 점령했으나, 아직 초나라를 없애지는 못했네. 이는 하늘이 초(楚)나라를 돕고 있다는 증거라 할 수 있네. 자네는 망명할 때 내게 이런 말을 했었지.

- 내 반드시 초나라를 멸망시키고야 말리라.

그에 대해 나는 이렇게 대답했지.

- 나는 반드시 초(楚)나라를 지켜내겠노라.

지금까지 자네와 나는 각기 소신대로 행동해왔네. 그러면서도 우리는 서로 미워하지 않았네.

오자서여, 초나라를 더 이상 핍박하지 말라.

나 또한 더이상 진(秦)나라 힘을 빌리지 않으리라.

오자서(伍子胥)는 손무에게 신포서의 서신을 보이며 말했다.

"이번에 우리는 초나라 영성을 점령하여 종묘를 태우고 사직을 쓸어 버렸소. 비록 진(秦)나라에게 패하기는 했지만, 별로 큰 타격을 입지 않았소."

"옛 병서의 말에 '징조가 보이면 나아가고, 가망이 없으면 물러서라'고 하였소. 지금 초(楚)나라는 우리 형편을 모르는 모양이오. 신포서의 말을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속히 오(吳)나라로 돌아갑시다."

손무(孫武)가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아무런 조건없이 그냥 물러간다면 이는 이기고도 진 것이 됩니다. 그대는 어찌하여 공자 승(勝)을 위해 힘쓰지 않소?"

오자서는 손무의 말뜻을 금방 알아들었다.

"그렇군요. 내가 공자 승을 잊고 있었구려."

즉시 붓을 들어 신포서에게 보내는 답신을 썼다.

내용은 이러하다.

자네도 알다시피 지난날 초평왕(楚平王)은 죄 없는 세자 건(建)을 추방하고 충신들을 수 없이 죽였네. 나는 그 당시의 분을 참을 수 없어 오늘에까지 이르른 것이네.

옛날 제환공은 형(邢)나라를 존속시키고 망한 위나라를 일으켜준 적이 있네. 또 진목공(秦穆公)은 세 번씩이나 진(晉)나라 임금을 세워주었네.

하지만 그들은 영웅답게 조금도 영토를 탐하지 않았네. 나 오자서 또한 비록 재주는 없지만, 의기는 쇠하지 않았네.

죽은 세자 건(建)의 아들 공자 승(勝)은 지금 오나라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네. 초나라는 공자 승을 소환하여 죽은 세자 건의 제사라도 받들게 해줄 아량은 없는가. 그렇게 해주기로 약속한다면 나 또한 속히 물러가겠네.

신포서(申包胥)는 오자서의 편지를 읽고 공자 신과 공자 승(勝)에 관한 일을 의논했다.

공자 신(申)은 대범한 사람이었다.

"억울하게 죽은 세자 건의 아들을 데려오는 건 평소 나의 뜻이었소.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시오."

곁에 있던 심제량(沈諸梁)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끼여들었다.

"세자 건(建)은 쫓겨난 사람입니다. 그 아들 공자 승(勝)은 우리 초나라


제 35장 신포서(申包胥)의 피눈물 (8) 


- 본국으로 돌아간다!

오자서와 손무는 회군길에 올랐다.

영성을 떠나기 전 오(吳)나라 군사들은 초나라 왕궁에 있는 보화와 비단등을 몽땅 내어 수레에 실었다. 아울러 국경지대에 있는 초(楚)나라 백성 1만여 호를 오나라 황무지로 강제 이주시켰다.

오(吳)나라는 땅에 비해 인구가 현저히 부족했다. 늘 농사 짓는 데 애를 먹었다. 따라서 이런 식의 대규모 강제 이주는 인구를 늘려야 하는 오나라로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방편 중의 하나였다.

오자서와 손무는 각기 두갈래 길로 나누어 귀환했다. 손무(孫武)는 수로를 따라 오성으로 향했고, 오자서(伍子胥)는 예장 땅을 경유하는 육로를 선택했다.

오자서(伍子胥)가 선택한 육로는 10여 년 전 그가 오(吳)나라로 망명하던 때의 바로 그 길이었다. 그때는 초군에게 쫓기느라 하룻밤 사이에 머리카락과 수염이 하얗게 셀 만큼 초조와 불안에 시달렸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정복자로서의 여유와 감상이 온몸에 배어 있었다. 눈에 익은 풍경을 볼 때마다 오자서(伍子胥)는 망명 당시의 시절을 떠올리곤 했다.

'동고공(東杲公)..........!'

자신을 도와준 첫 은인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오자서가 있었을까.

오자서의 발길은 자신도 모르게 역양산(歷陽山)을 향하고 있었다.

'조금이나마 은혜를 갚고 싶다.'

그러나 동고공이 살던 역양산 골짜기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동고공(東杲公)이 살던 모옥은 불타버렸는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고, 사람의 그림자 또한 찾아볼 수 없었다.

'어디로 갔을까.'

그는 혹시나 하여 사람을 용동산(龍洞山)으로 보내어 황보눌(皇甫訥)의 소식을 알아오게 했다.

용동산으로 갔던 사람이 돌아와 고했다.

"황보눌(皇甫訥)의 종적도 찾을 수 없습니다."

오자서는 탄식했다.

"고고한 분들이로다!"

오자서(伍子胥)는 동고공이 살던 집터에 두 번 절을 올리고 역양산을 내려왔다.

이번에는 소관(昭關)으로 향했다.

지난날과 달리 소관에는 파수 보는 초(楚)나라 군사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당시 가슴 조이던 일을 생각하니 새삼스레 분노가 솟았다. 오자서(伍子胥)는 군사들을 시켜 소관을 불태워버렸다.

다시 율양(慄陽) 땅 뇌수가로 갔다. 세월이 흘렀건만 강물은 변함없이 흐르고 있었다. 오자서(伍子胥)는 뇌수 강변에 서서 굽이치는 물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내가 지난날 배가 고파 이곳에서 빨래하는 여자에게 밥을 구걸한 적이 있다. 그때 그 여자는 내게 밥을 주었을 뿐 아니라 강물 속에 몸을 던져 죽었다. 그때 내가 바위에다 글을 지어 써넣은 것이 있는데, 지금도 남아 있는지 모르겠구나."

오자서(伍子胥)는 기억을 되살려 바위를 찾아 덮어놓았던 흙을 치웠다.

바위에는 지난날에 쓴 글자가 완연히 남아 있었다. 감개에 젖은 오자서는 그 여인에게 은혜를 갚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여인의 집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천금을 뇌수(瀨水) 강물에 던져넣으며 외쳤다.

"빨래하던 여인이여, 만일 영혼이 있다면 내가 그대를 저버리지 않았음을 알아주기 바라오."

오자서(伍子胥)가 그 곳을 떠나 한 마장쯤 갔을 때였다.

길가에 한 노파가 앉아 있다가 지나가는 오(吳)나라 군사들을 보고 대뜸 통곡하기 시작했다. 군졸 하나가 노파에게 다가가 우는 까닭을 물었다.

"노파는 어찌하여 우리를 보고 우는 게요?"

노파가 눈물을 씻으며 곡절을 얘기했다.

"나는 팔자가 기박하여 딸과 단둘이서 살았었소. 내 딸은 서른이 되도록 시집을 가지 않았지요. 그런데 10여 년 전에 내 딸이 뇌수(瀨水)가에서 빨래를 하다가 도망자인 듯한 한 나그네에게 밥을 대접했다오."

"딸은 이 사실이 알려질까 염려하여 결국 뇌수(瀨水)에 몸을 던져 죽었지요. 그 후에 들으니 그 나그네가 초나라의 망명객인 오자서(伍子胥)장군이라고 합디다. 그런데 이번에 오자서 장군이 초(楚)나라를 크게 무찌르고 돌아오는 중이라는데, 내 딸은 이 기쁜 소식을 알기나 할려는지....그대들을 보니 딸이 생각나서 눈물이 절로 나는구려."

군졸이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들의 대장이 바로 오자서(伍子胥) 장군입니다. 이번에 따님에게 보답하려고 이 곳을 찾았으나 집을 알지 못하여 결국 천금을 뇌수(瀨水) 강물에 던져 넣었습니다. 노파는 어서 가서 그 천금을 건지시오."

그 얘기를 들은 노파는 황급히 뇌수가로 가서 오자서가 던져 넣은 천금을 건져냈다. 이후로 사람들은 그 뇌수가를 '투금뢰(投金瀨)'라고 불렀다.

손무(孫武)는 장강의 빠른 물살을 타고 10여 일 만에 오성에 당도했다.

그때 월(越)나라 군사들은 막 오성 교외로 진격해 들어오고 있는 중이었다. 손무는 합려에게 귀국 보고를 올리자마자 다시 군사를 거느리고 월군을 맞아 싸우러 나갔다.월왕 윤상(允常)은 이미 손무에게 한 번 크게 패한 적이 있었다.

손무라는 이름만 들어도 겁을 먹었다. 그는 손무가 영성에서 돌아왔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전군에 명을 내렸다.

- 오(吳)나라 치는 일은 뒤로 미루겠다. 모든 군사는 본국으로 돌아가라.

월군이 오나라 땅에서 완전히 철수했을 때 오자서도 오성으로 돌아왔다.

지난 1년 반 사이 오왕 합려는 꿈같은 세월을 보냈다.

난공불락이라 여겨지던 초(楚)나라 수도 영성을 점령하고 자신의 이름을 중원 전역에 떨치지 않았는가.

이 모든 공이 병법의 귀재인 군사(軍師) 손무와 당대 최고의 풍운아 오자서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그 중에서 합려는 손무를 으뜸 공로자로 삼았다. 그에게 많은 상과 높은 벼슬을 내릴 작정으로 손무를 불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손무(孫武)가 사람을 보내 대신 아뢰었다.

- 신은 이제 그만 은퇴할까 합니다. 상과 벼슬은 필요 없습니다.

합려는 놀랐다. 내관을 보내 만류했으나 손무는 여전히 사양했다.

다급해진 합려는 오자서에게 명하여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손무를 붙잡으라고 분부했다. 오자서(伍子胥) 또한 손무의 은퇴 소식에 놀라 황급히 그의 집으로 달려갔다.

오자서(伍子胥)가 손무의 손을 잡고 물었다.

"내 그대와 함께 큰 뜻을 이루려 하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나를 버리려 함이오?"

손무(孫武)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대는 천도(天道)를 아시오?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고, 겨울이 가면 봄이 오지요. 내가 보기에 지금 오왕은 사방에 걱정거리가 없어졌소. 강성하면 교만해지고, 교만해지면 쇠락해집니다. 한 개인의 일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을 이루고 물러서지 않으면 반드시 큰 불행이 닥칩니다. 나는 평생 병법을 연구해온 사람이오. 병법의 극의(極意)가 무엇인줄 아시오? 바로 물러날 때 물러날 줄 아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生)도 생각해보면 싸움이나 다름없습니다."

"나는 다만 지금 내가 물러날 때라는 것을 알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대 또한 나와 함께 물러남이 어떠한지요?"

오히려 오자서에게 함께 은퇴하자고 권하는 것이었다.

오자서(伍子胥)는 3일 낮 3일 밤을 만류했으나 끝내 손무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다.

결국 손무(孫武)는 오자서에게 작별을 고하고 표연히 오성을 떠났다.

합려도 어쩔 수 없이 그의 은퇴를 승낙하고 황금과 비단을 가득 실은 수레를 뒤딸려보냈다. ]

그러나 손무는 길을 가는 도중 가난한 백성들에게 그 황금과 비단을 모두 나눠주었다.

그 후 손무의 행적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서(史書) 어디에도 기록이 남겨져 있지 않다. 오늘날 병법의 대가라고 불리는 손무(孫武)는 이렇듯 홀연 나타났다가 홀연 사라져버렸다. 

마치 한 줄기 바람처럼. 

다만 그가 남긴 것은 오늘날까지도 병가의 경전으로 평가받고 있는 <손자병법> 13편과 '손무(孫武)'라는 이름 두 자다.

과연 그는 병법의 대가답게 나가고 물러남 또한 절묘했다고밖에 할 수 없다.

- 지망지존(知亡知存).

이것이 손무(孫武)가 세상 사람들에게 가르치려 했던 오의(奧義)가 아니었을까.


제 35장 신포서(申包胥)의 피눈물 (9) 


손무가 표표히 사라지고 난 뒤 오왕 합려(闔閭)는 오자서를 재상으로 삼았다. 그는 옛날 제환공이 관중을 '중보(仲父)'라 불러 신하를 특별히 존경의 예로 대한 것처럼, 오자서를 '자서(子胥)'라고 불러 대우했다.

합려(闔閭)는 백비에게도 많은 상과 높은 벼슬을 내렸다.

그를 태재(太宰)로 삼아 오자서와 더불어 국정을 보살피게 했다.

이어 오성 서쪽 성문을 '파초문(破楚門)'이라 고쳤다.

서쪽 문으로 나가 초(楚)나라를 깨뜨리고 돌아왔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붙였다. 남쪽 경계에는 돌을 쌓아 요새 하나를 만들었다. 월(越)나라 군사의 침공을 막기 위한 요새였다. 돌로 쌓은 관문이라 하여 요새 이름을 석문관(石門關)이라 명명했다.

오나라의 월나라에 대한 경계가 강화되자 월(越)나라에서도 이에 질세라 오나라에 대한 경비를 철저히 했다. 월왕 윤상(允常)은 절강 어귀에다 큰 성을 쌓았다. 그러고는 성을 고릉(固陵)이라 부르게 했다. 견고하게 지킨다는 뜻이다.

이때부터 오나라와 월나라는 더욱 사이가 나빠졌다.

BC 505년 오왕 합려 10년 무렵의 일이었다.

초군 대장 공자 신(申)과 결(結)은 오군이 빠져나가고 난 빈 영성으로 돌아왔다. 영성 안팎의 광경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왕궁과 집들은 불타버리고, 창고는 약탈당해 비단 한 조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 아!"

공자 신은 자기도 모르게 탄식했다.

동문 밖으로 나가보았다.

파헤쳐진 초평왕(楚平王)의 무덤이 을씨년스러움을 더해주었다. 공자 신(申)은 눈물을 뿌리며 조각조각 흩어진 초평왕의 뼈를 거두어 다시 매장했다. 궁으로 돌아와 불탄 종묘를 새로 짓고 사직단도 다시 쌓았다.

왕궁과 성안 거리를 어느 정도 복구하고 났을 때 신포서(申包胥)는 수나라에 머물러 있는 초소왕을 모시러 갔다.

초소왕(楚昭王)은 수나라 임금에게 거듭 감사의 말을 전하고 영성으로 향하는 배에 올라탔다. 배는 운수를 따라 빠르게 내려갔다. 운(鄖) 땅을 지나 운수 하류에 이르렀다. 그 곳 사람들은 운수 하류를 청발수(淸發水)라고 부른다.

장강(長江)과 만나는 지역이다.

초소왕을 태운 배는 장강으로 들어서자마자 물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이때부터 배는 느릿하게 움직였다. 초소왕(楚昭王)은 배 난간에 기대어 사방 경치를 둘러보았다. 지난 2년여 가까운 시간이 한바탕 사나운 꿈 같았다. 자신의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악몽이었다.

피난 중에 겪었던 온갖 고생스러웠던 일들이 주마등(走馬燈)처럼 떠올랐다 사라져갔다.

'다시 이 강을 거슬러올라갈 줄이야.'

감개가 새로웠다.

배가 장강과 한수가 만나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였다.

물 위로 이상한 물건이 떠내려오는 게 보였다. 크기는 말(斗)만했고, 빛깔은 선홍색이었다.

"저것이 무엇일까?"

초소왕(楚昭王)은 노 젓는 자를 시켜 그 이상한 물건을 건져오게 했다. 여전히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이 물건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나와보라."

그러나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초소왕은 칼을 뽑아 그 물건을 둘로 쪼갰다. 속은 오이와 비슷했다. 먹어보니 매우 맛이 좋았다. 초소왕(楚昭王)은 그것을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신하들과 함께 먹었다.

"이 과일 이름을 알려면 아마도 꽤나 박식한 학자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구나."

한수와 만나는 지점을 지나 운중(雲中) 땅으로 들어섰다. 초소왕(楚昭王)은 우중 언덕에 배를 대고 나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 곳이 지난날 과인이 도적을 만났던 곳이로구나. 내가 어찌 이 곳을 잊을 수 있으리오. 대부 투신(鬪辛)은 이 곳에다 조그만 요새를 쌓아라. 그러면 길 가는 나그네들을 도적들로부터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투신(鬪辛)은 초소왕의 명령에 따라 후일 운중과 몽(夢) 땅 사이에 요새 하나를 쌓았다. 지금도 운몽현에 가면 초왕성(楚王成)이란 곳이 있다. 그 곳이 바로 당시 요새를 쌓았던 터라고 한다.

마침내 초소왕(楚昭王)은 영성으로 돌아왔다.

길가에 무수히 굴러다니는 해골들이 다시 한 번 그의 가슴을 찢어지게 했다. 왕궁으로 들어 먼저 생모인 맹영(孟嬴)에게로 갔다. 모자는 서로 얼싸안고 대성통곡했다.

초소왕(楚昭王)이 흐느끼며 말했다.

"소자가 불민하여 이런 큰 변을 당했습니다. 언제 이 기막힌 원한을 설치(楔齒)할 수 있을런지 눈앞이 캄캄하기만 합니다."

맹영(孟嬴)이 그런 초소왕을 따뜻이 위로했다.

"무엇보다도 왕께서 무사히 환궁하셨으니 다행입니다. 먼저 상벌을 밝히고 백성들을 위로하여 안정시키십시오. 그런 후에 힘을 길러 지난날의 강성함을 회복하십시오."

다음날부터 초소왕(楚昭王)은 심기일전하여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했다. 그는 우선 새로 지은 종묘사직에 제사를 지내고 초평왕의 능묘에 참배했다. 이어 문무백관을 불러들여 말했다.

"이번에 우리나라가 겪은 불행은 다 과인의 죄요, 다시 나라를 찾게 된 것은 모두 경(卿)들의 공이오. 이번 일을 계기로 상하가 합심하여 우리 초나라를 부흥시킵시다."

초소왕(楚昭王)은 잔치를 베풀어 진(秦)나라 장수와 군사들을 위로하여 돌려보냈다. 아울러 논공행상을 실시했다.


​그는 먼저 자신의 이복형인 공자 신(申)을 영윤으로 삼고, 공자 결(結)을 좌윤으로 삼았다. 그리고 영성 수복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신포서에게 우윤의 벼슬을 내렸다.

그런데 신포서(申包胥)는 초소왕의 상과 벼슬을 사양했다.

"신이 진(秦)나라 군사를 청해 오군을 무찌른 것은 초(楚)나라를 구하기 위해서였을 뿐, 결코 제 일신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이제 왕께 나라를 돌려드렸으니, 신의 소원은 이루어진 셈입니다. 어찌 더 이상의 이익을 바라겠습니까?"

그 날 밤이었다.

신포서(申包胥)는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집을 나와 몰래 영성을 떠났다. 아내가 신포서에게 물었다.

"당신이 애를 써서 초(楚)나라를 다시 찾았습니다. 왕이 당신에게 상을 내리는 것은 당연한데, 당신은 어찌하여 이렇듯 도망치시는 것입니까?"

신포서(申包胥)가 대답했다.

"지난날 오자서(伍子胥)는 내게 초나라를 쳐서 부형의 원수를 갚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소. 그러나 나는 친구간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오자서를 도망치게 내버려두었소. 즉 나는 오자서가 초(楚)나라를 치도록 방조한 셈이오. 이런 죄가 있는데, 나라를 구한 공이 있다 하여 상을 받는다는 것은 나의 수치요."

신포서(申包胥)는 처자를 데리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제 35장 신포서(申包胥)의 피눈물 (10) 


신포서(申包胥)가 처자를 데리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간 사실을 뒤늦게 알게된 초소왕(楚昭王)은 백방으로 사람을 놓아 신포서의 행방을 찾았으나 끝내 그를 찾지 못했다.

그 후에도 신포서(申包胥)를 보았다는 사람은 일절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초소왕(楚昭王)은 신포서가 살던 영성 집에다 정문(旌門)을 세우고 이를 '충신지문(忠臣之門)이라고 했다.

초소왕(楚昭王)은 신하들에게 다시 말했다.

"내가 운중 땅에서 도적을 만났을 때 왕손 유우(由于)는 나를 대신하여 도적의 창에 찔렸다. 내 어찌 그 마음을 잊을 수 있으랴."

그러고는 신포서가 사양한 우윤직을 왕손 유우에게 내렸다.

그 밖에 심제량, 종건, 송목, 투신, 투소, 원연 등의 장수들에게도 각기 벼슬을 올리고 땅을 하사했다.

이때의 일과 관련하여 <춘추좌씨전>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온다.

초소왕(楚昭王)은 모든 사람들에게 상을 내렸으나 오직 한 사람에게만은 참수형을 내리려 했다.

다음 아닌 남윤 미(亹)였다.

- 내가 강을 건너려는데 남윤 미는 배를 타고 있으면서도 배를 태어주기는커녕 나를 욕하고 그냥 가버렸다. 어찌 이런 자를 그냥 내버려둘 수 있으리오.

남윤 미(亹)가 참수형을 당하게 되었다는 말을 들은 공자 신(申)은 황급히 초소왕에게로 가 말했다.

- 지난날 영윤이었던 낭와는 늘 지난 일의 원한만 생각했다가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왕께서는 어찌하여 낭와와 똑같은 짓을 반복하려 하십니까?

초소왕(楚昭王)은 무릎을 치며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 옳은 말이오. 나는 나의 지난날의 과실을 잊지 않고 기억하겠소.

그러고는 남윤 미(亹)의 결박을 풀어주고 그대로 남윤 벼슬에 있게 했다.

초소왕의 도량을 말해주는 일화다.

또 이런 일화도 기록하고 있다.

초소왕(楚昭王)은 포상의 대상자에 투회(鬪懷)도 포함시켰다. 투회는 투신의 동생으로, 초소왕이 운 땅에 피란갔을 때 왕을 죽이려고 칼을 간 바 있는 바로 그 사람이다.

영윤인 공자 신(申)이 의아해서 물었다.

- 투회(鬪懷)는 지난날 왕을 시해하려던 자입니다. 벌을 내려야 하거늘 오히려 상을 내리려 하시니 어인 까닭이십니꺼?

초소왕(楚昭王)이 웃으며 대답했다.

- 그가 나를 죽이려 했던 것은 자기 아버지 원수를 갚기 위해서였소. 그러므로 그는 효자요, 효자가 어찌 충신이 될 수 없겠소.

초소왕은 기어코 투회(鬪懷)를 불러 대부로 삼았다. 이에 모든 신하는 초소왕의 도량에 감복하여 그 덕을 높이 칭송했다.

이후 초(楚)나라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왕과 신하들이 조금도 허튼 짓을 하지 않고 재건에 힘을 쏟았다. 초소왕(楚昭王)은 오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월나라와 더욱 친선을 도모했다.

월왕 윤상의 딸을 새 부인으로 맞아들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여동생인 계미를 월나라에 시집보내려 했다.

그러자 계미가 초소왕에게 말했다.

"여자는 외간 남자와 가까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지난날 운 땅으로 파란갔을 때 대부 종건(鍾建)의 등에 업혀 도적의 화를 피한 적이 있습니다. 저의 몸은 이미 종건의 것입니다. 어찌 다른 사람에게 시집갈 수 있겠습니까?"

초소왕(楚昭王)은 계미의 말을 기특하게 여기고 그녀를 종건에게 시집보냈다. 초소왕의 매부가 된 종건(鍾建)은 음악에 밝았으므로 사악(司樂)대부라는 관직에 올랐다.

초소왕(楚昭王)은 국력 회복에 온 힘을 쏟았으나 이미 오군의 발길에 짓밟힌 영성에 마음을 잃었다. 또 영성 내부를 샅샅이 알고 있는 오군(吳軍)이 다시 쳐들어오는 것도 염려되었다.

- 도성을 옮기는 것이 어떠한가?

신하들은 초소왕의 의견에 찬성했다.

영성을 수복한 이듬해인 BC 504년(초소왕 12년)에 초나라는 수도를 약(鄀)이라는 땅으로 옮겼다. 약은 지금의 호북성 자충현으로, 양양 땅 정남쪽 일대다.

한때는 독립국이었으나 초(楚)나라에 의해 멸망했다.

초소왕(楚昭王)은 새 도읍인 약을 신영(新郢)이라 부르게 했다. 사람들에 따라서는 언영(鄢郢)이라고도 부른다. 독립국이었을 때 나라 이름이 언(鄢)이었기 때문이었다.

신영으로 도읍을 옮긴 초소왕(楚昭王)은 더욱 심기일전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종일 나라일을 살폈다. 형벌을 줄이고 세금을 감했다. 인재를 양성하고 군사를 조련했다. 모든 관문을 수리하고 변방을 굳게 지키게 했다.

그 무렵, 오나라에 있던 공자 승이 초나라로 돌아왔다.

초소왕은 약속대로 공자 승(勝)을 백공(白公)에 봉하고 허(許) 땅에다 백공성을 쌓아주었다. 이때부터 공자 승은 백씨(白氏)가 되어 대대로 허 땅에서 살았다.

또 한 사람이 초(楚)나라로 망명해왔다.

자신의 형인 합려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오나라 공자 부개였다.

부개(夫槪)는 반란에 실패하자 송(宋)나라로 달아났다가 초소왕이 지난날의 일에 감정을 품지 않는다는 소문을 듣고 초나라로 망명해온 것이었다.

과연 초소왕(楚昭王)은 부개를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그에게 당계(堂谿) 땅을 식읍으로 내주었다. 이때부터 부개(夫槪)는 당계에 살면서 당계씨(堂谿氏)가 되었다.

초소왕(楚昭王)의 선정은 10년간 계속되었다.

이리하여 초(楚)나라는 다시 예전의 강성함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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