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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列國誌] 2부 장강의 영웅들 (279) 공자(孔子)시대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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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4회 작성일 23-02-18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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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6장 공자(孔子)시대 (1) 


장강과 회수, 한수 일대를 중심으로 초(楚)나라와 오(吳)나라가 끊임없이 다툼을 벌이는 동안, 황하를 중심으로 한 북방의 중원지대에는 한 사내가 등장하여 조용하면서도 신선한 충격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사내의 성은 공(孔),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공구(孔丘)나 공중니(孔仲尼)라고 부르지 않았다.

한결같이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이름하여 '공자(孔子)'였다.

- 공자.

너무나 유명한 이름이다.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나 일본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친 대성(大聖)이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요즘도 우리는 알게 모르게 공자와 더불어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공자는 영생불멸의 성인이다.

공자의 사상은 한마디로 '인(仁)'과 '예(禮)'다.

특히 예에 대해서 강조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서야하는데, 그 기본 중의 기본이 바로 '예(禮)'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주창한 것이 '극기복례(克己復禮)'다.

극기란 자기 자신의 완성이요, 복례란 타인과의 원활한 관계를 말함이다. 자신을 먼저 세워야 예(禮)가 있는 사회가 이루어질 것이요, 예가 서야 인(仁)이 행해지는 세상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공자(孔子)는 설파했다.

다 아는바와 같이 공자(孔子)는 자신의 시대에 자신의 사상을 꽃피우지는 못했다. 공자의 사상, 즉 유학(儒學)이 전성을 이룬 것은 한(漢)나라 때였다. 그는 사후에야 세상을 뒤흔드는 사상가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공자의 사상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공자(孔子)가 태어나 성장하고 활동하던 시기는 두말할 나위없이 춘추시대 후기다. 난신적자(亂臣賊子)가 성행하고, 권모술수(權謀術數)가 판을 치던 어지러움의 시대, 이 시대에 과연 공자가 정치적으로는 어떠한 행로를 밟았는지를 잠깐 보여주고자 할 뿐이다.

공자(孔子)는 BC 551년(노양공 22년) 노나라 추읍(鄒邑)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양공 22년이라면 진(晉)나라 권력 대부 중의 한 사람인 난영이 진나라에서 축출되어 제(齊)나라로 망명한 바로 그 해다.

<사기>나 <춘추좌씨전>은 모두 이 해를 공자 출생의 해로 잡고 있으나,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과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은 1년 앞당긴 BC 552년을 공자 출생의 해로 기록하고 있다.

공자의 선조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송나라 귀족이었다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춘추시대 초기 송나라에 공보가(孔父嘉)라는 사람이 있었다.

송상공(宋殤公) 시절, 그는 태재인 화독(華督)의 공격을 받고 멸족을 당했다. 그때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혈육 하나가 있었다. 충복의 품에 안겨 겨우 목숨을 구한 그 혈육의 이름은 목금보(木金父).

충복은 목금보를 끌어안고 노(魯)나라로 탈출했다.

그 뒤 목금보는 노나라에 살면서 다시 성을 공(孔)으로 바꾸었는데, 그가 바로 공자의 6대조라는 것이다.

<사기>의 <공자세가(孔子世家)>에는 공자의 선조로 3대조인 공방숙(孔防叔)을 기록하고 있다.

그의 선조는 송나라 사람 공방숙이다.

방숙(防叔)은 백하(伯夏)를 낳았고, 백하는 숙량흘(叔梁紇)을 낳았다.

이 숙량흘(叔梁紇)이 바로 공자의 아버지다.

숙량흘의 신분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사(士)였다. 사라고 하면 얼핏 선비를 떠올릴 수 있겠으나, 이 무렵은 아직 문무가 확실하게 구별되지 않았기 때문에 단순히 선비로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사(士)는 훗날 선비와 무사 두 신분으로 나뉘어진다. 대부보다 한 단계 아래로서,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신분이라고 하면 적당할 것이다. 제나라의 명재상 안영의 아버지 안약(晏弱)도 사(士)였다. 부역을 나가는 평민보다는 위다.

숙량흘(叔梁紇)은 사(士)의 신분으로서 무예가 뛰어난 용사였다.

힘도 셌다. 그는 젊었을 적 싸움터에 나가 무너져 내리는 성문을 혼자 두 손으로 떠받칠 정도의 용맹을 과시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숙량흘(叔梁紇)은 원래 노나라 시씨(施氏) 집 여자에게 장가를 들었다.

시씨와의 사이에 딸만 여럿을 낳고 아들은 낳지 못했다. 그래서 첩을 두었는데, 첩의 몸에서 아들 맹피(孟皮)가 태어났다. 그러나 맹피는 백치인데다가 다리를 못쓰는 불구가 되었다.

숙량흘(叔梁紇)은 다시 여자를 얻기로 하고 안씨(顔氏) 집에 매파를 보냈다. 이때 숙량흘의 나이 60이 넘지 않았을까.

안씨에게는 시집가지 않은 딸이 다섯이나 있었다. 안씨는 이미 노인이된 숙량흘에게 딸을 주기가 싫었다. 그렇다고 숙량흘의 청혼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딸 다섯을 불러놓고 물었다.

- 너희들 중 누가 숙량흘(叔梁紇)에게 시집갈 테냐?

위로 네 딸은 묵묵부답이었다. 가장 어린 막내딸 징재(徵在)만이 대답했다.

- 여자는 출가하기 전 아버지의 말씀을 좇을 뿐입니다. 저희들에게 물을 것 없이 아버지께서 정하십시오.

안씨(顔氏)는 그말을 듣고 막내딸 징재를 숙량흘에게 시집보냈다.

숙량흘(叔梁紇)은 징재와 혼인했으나 자식이 생기지 않아 늘 근심이었다. 이에 그들 부부는 중니산(仲尼山)에 올라가 기도를 드리기로 했다.

하루는 그들이 중니산으로 올라가는데 모든 풀과 잎들이 그녀를 향해 꼿꼿이 일어섰다. 또 기도를 마치고 산을 내려올 때는 풀과 잎들이 다 아래로 처졌다.

'이상한 일이로군.'

그 날 밤 징재(徵在)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흑제(黑帝)에게 불려갔다.

흑제란 겨울의 신(神)이다. 북방의 신이기도 하다. 그 흑제가 징재에게 말했다.

- 그대는 성스러운 아들을 둘 것이다. 장차 공상(空桑)에서 태어나리라.

깨어보니 꿈이었다.

그 날 밤부터 징재에게는 태기가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장재(徵在)가 비몽사몽간에 뜰을 바라보니 다섯 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징재를 향해 말했다.

- 우리는 오성(五星)의 정령이다.

다섯 노인은 송아지만한 짐승 하나를 데리고 있었다.

그런데 뿔이 하나였고, 온몸이 용 비늘 같은 무늬로 얼룩얼룩하였다. 짐승은 징재(徵在)를 향해 엎드리더니 옥척(玉尺)하나를 토해냈다. 옥척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져져 있었다.

수정(水精)의 아들은 쇠약한 주(周)나라를 계승하여 소왕(素王)이 되리라.

소왕이란 무늬없는 옷을 입은 왕, 즉 지위없는 왕을 말함이다.

징재(徵在)는 신기하고 놀랍기도 하여 비단 끈으로 그 짐승의 뿔을 곱게 매주었다.

그 날 저녁, 징재(徵在)는 외출에서 돌아온 남편 숙량흘에게 낮에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숙량흘이 말했다.

- 그 짐승은 기린(麒麟)이었을 것이오.

해산달이 되었다.

징재(徵在)가 숙량흘에게 물었다.

- 공상(空桑)이란 곳을 아십니까?

- 남산(南山)에 빈 도랑이 있는데, 그 곳에 돌로 된 굴이 하나 있소. 그 굴 속에는 물이 없소. 그래서 사람들은 그 곳을 공상이라고 부른다오.

- 저는 그 곳에 가서 해산하겠습니다.

- 어째서 그 곳에서 해산해야 한단 말이오?

- 전날 꿈속에서 흑제(黑帝)를 뵈었는데, 흑제께서 공상에서 해산하라 명했기 때문입니다.

숙량흘(叔梁紇)은 징재를 데리고 남산의 공상으로 들어가 이부자리를 폈다.


제 36장 공자(孔子)시대 (2) 


그 날 밤 징재(徵在)에게 산기(産氣)가 왔다. 문득 하늘에서 창룡(蒼龍) 두 마리가 내려와 산 좌우를 지켰다. 또 공중에서 신녀(神女) 두 사람이 내려와 향로를 받들었다. 두 신녀는 징재를 목욕시킨 후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

잠시 후 징재(徵在)는 아들을 낳았다.

이때 석문(石門)에서 맑은 샘물이 솟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그 샘물은 따뜻했다. 갓난아기를 목욕시키고나자 샘물은 다시 말라버렸다.

숙량흘(叔梁紇)은 기뻐하며 말했다.

- 이 아이는 중니산에서 기도를 드려 난 아이니, 이름을 구(丘)라 하고 자를 중니(仲尼)라 합시다.

산동성 곡부현에서 30리쯤 남쪽으로 가면 여릉산(女陵山)이라는 산이 있다. 지금도 그 산에 오르면 공자가 탄생했다는 공상(空桑)이란 곳이 있다.

이 탄생 일화는 상당히 설화적이고 꾸민 냄새가 난다.

유교가 국교화된 이후 그 시조에 대해 미화작업을 벌인 것임에 틀림없다.

이에 반해 사마천(司馬遷)의 공자 출생에 관한 기록은 상당히 실제적이고 인간적이다.

흘(紇), 안씨와 야합(野合)하여 공자를 낳았다.

이구(尼丘)산에서 기도를 하여 공자를 얻었다. 노양공(魯襄公) 22년에 태어났다. 머리 중간이 움푹 패어 있었기 때문에 구(丘)라고 이름지었다.

자(字)는 중니(仲尼), 성은 공(孔)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야합(野合)'이라는 말이다. 야합이란 말 뜻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하다. 정식으로 결혼한 부부가 아니라는 설이 있고, 정식으로 결혼했으나 예(禮)를 갖추지 못했을 것이라는 설(說)도 있다. 또 나이 차이가 너무 큰 결혼을 일러 야합이라고 주장하는 설도 있다.

그러나 역시 첫번째 설(說)이 가장 많이 통용된다.

그 근거로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고 있다.

공자(孔子)가 태어나고 얼마 안 있어 숙량흘(叔梁紇)은 세상을 떠났는데, 공자는 오랫동안 아버지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어머니조차 무덤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아버지의 무덤을 가르쳐주지 않은 까닭이 무엇이었을까.

이 답이 바로 야합(野合)이라는 것이다.

떳떳한 부부 사이였다면 어찌 남편의 무덤을 쉬쉬하고 숨길 것인가.

어쨌거나 공자(孔子)는 늙은 아버지, 젊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이내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에게서 양육되었다.

공자의 어린 시절은 가난하고 천했다.

희한한 것은 소꿉장난을 할 때 늘 제기(祭器)를 펼쳐놓고 예(禮)를 올리는 놀이를 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제례(祭禮)란 곧 학문을 말할 수도 있다. 당시의 학문에는 반드시 예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이 일화를 근거로 공자의 어머니는 무당이 아니었을까 하는 설(說)을 내세우는 사람도 있다.

그는 성년이 되어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에야 아버지의 무덤을 찾았고, 비로소 방산(防山)이라는 곳에 어머니와 함께 합장했다.

공자(孔子)는 키가 9척 6촌이나 되었다.

2m 가 넘는 상당한 거구다. 그래서 그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키다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학문과 높은 덕성은 젊어서부터 인근에 알려지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 알려짐은 우리가 짐작하는 것처럼 그렇게 선풍적이지는 않았다. 미리 말하면 공자의 명성이 중원 천지에 널리 알려진 것은 나이 50이 넘어서 행한 주유천하 (周遊天下) 이후부터다. 그 전까지는 노(魯)나라 일부지역에서만 그의 학문과 사상과 성덕을 인정해주었을 뿐이다.

당시 청년들이 그러했듯 공자도 젊어서는 관직에 진출했다.

그가 처음 맡은 일은 위리(委吏), 즉 창고지기였다. 그것도 나라의 창고지기가 아니라 당시 집권자 중 하나인 계씨(季氏)의 관리인으로서였다.

그는 보잘것없는 말단관리였지만 자신의 일에 충실했다.

위리에 이어 승진된 직책은 승전(乘田)이라는 관직이었다. 승전이란 목장 관리인인데, 그가 목장을 관리하면서부터 우마(牛馬)가 잘 번식했다고 사서(史書)들은 기록하고 있다.

그런 중에도 공자(孔子)는 자신의 학문 정진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차츰 고관대작들 사이에까지 알려지기 시작했다.

공자(孔子)가 성장하여 활동했던 시기는 매우 혼란하고 어지러운 때였다.

특히 공자가 속했던 노(魯)나라는 하극상까지 만연하여 춘추시대 후기의 전형이라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공자가 관직에 진출했을 당시의 노나라 군주는 노소공(魯昭公)이었다. 그런데 노소공에게는 아무런 권한이 없었다. 허수아비 군주였다. 

나라의 실권을 쥔 사람은 계손씨(季孫氏), 맹손씨(孟孫氏), 숙손씨(叔孫氏)였다.

사람들은 이들을 삼환(三桓)이라 불렀다. 세 씨족 모두 노환공(魯桓公)의 후예이기 때문이다.

노환공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다.

제양공(齊襄公)의 누이동생 문강(文姜)을 부인으로 삼은 군주다. 제양공과 문강은 오누이면서 불륜 관계를 맺었다. 이 비밀을 알았기 때문에 노환공(魯桓公)은 제나라 땅에서 처절한 죽음을 당했다.

노환공(魯桓公)은 비운의 군주였지만 그 자손은 수대에 걸쳐 번영하여 노나라 국정을 장악하였다. 노(魯)나라의 모든 정치는 이 세 가문에 의해 이루어졌고, 이로 인해 군주는 꼭두각시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이런 중에 노소공(魯昭公)은 자신의 권한을 찾기 위해 삼환 토벌의 싸움을 일으켰다. BC 517년(노소공 25년)의 일이었다. 이때 공자의 나이 35세. 

그러나 노소공은 그 싸움에서 패했다. 그는 삼환에게 쫓겨 제(齊)나라로 망명을 했다.

삼환(三桓)은 새 임금을 세우지 않았다.

그냥 공석으로 놔두었다. 그래서 노(魯)나라는 이후 7년간 군주 없는 이상한 정치 행태를 보여주었다.

이때 공자(孔子)도 노소공이 망명해 있는 제(齊)나라로 들어갔다.

노소공을 섬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생각은 없었다. 

그가 제나라로 간 것은 삼환이 전횡하고 있는 노(魯)나라에서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제(齊)나라에서 관직을 얻으려고 했다.


제 36장 공자(孔子)시대 (3)


제(齊)나라 귀족 중에 고장(高張) 이라는 경대부가 있었다.

공자(孔子)는 고장의 가신으로 들어가 제경공(齊景公)에게 줄을 닿으려고 애썼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성공을 거두어 마침내 제경공을 알현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제경공(齊景公)이 공자에게 물었다.

- 어떻게 하면 나라가 순조롭겠소?

공자(孔子)가 대답했다.

- 군주는 군주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행해야 합니다. 그러면 나라는 평안합니다.

- 좋은 말이로다. 만일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고,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하면 비록 곡식이 있은들 내 어찌 그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인가?

며칠 후 다시 제경공(齊景公)이 공자를 불러 물었다.

- 어떻게 하면 나라를 부강하게 할 수 있겠소?

- 정치의 핵심은 재물을 절약하는 데 있습니다. 검소하고 또 검소하십시오.

근검절약의 사상을 잘 보여 주는 대목이다.

제경공(齊景公)은 공자의 말에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를 이계(尼谿)라는 땅에 봉하려 할 때였다.

재상 안영(晏嬰)이 나서서 반대했다.

-무릇 유학자는 말재간이 있어 법망을 교묘히 빠져나가며, 거만하고 제멋대로여서 신하로 두기 어렵습니다. 검소를 강조하면서도 상례(喪禮)를 중시하여 장례를 한 번 치르면 파산까지 서슴지 않으며, 도처에 유세(遊說)를 다녀 나라의 정치를 맡길 수도 없습니다.

- 현자(賢者)가 사라진 이래로 예악이 붕괴된 지 오래 되었습니다. 지금 공자(孔子)는 용모를 성대히 꾸미고 의례절차를 번거롭게 하고 세세한 행동규범을 강조하고 있으니, 이는 몇 세대를 지나도 다 배울 수 없습니다. 주공께서 공자를 채용하여 제(齊)나라 풍속을 바꾸려 하신다면 이것은 백성을 다스리는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절약가라면 안영(晏嬰)을 따라갈 사람이 없다.

그의 눈에 공자의 예의범절은 너무나 사치스럽고 위선적으로 비쳤다.

더욱이 제(齊)나라는 실리를 좇는 자유분방의 나라다.

반면 노(魯)나라 출신인 공자(孔子)는 형식과 예법에 얽매어 현실을 무시하는 경향이 짙다. 한마디로 제(齊)나라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상이라는 것이었다. 일종의 '공자 비판'이다.

제경공(齊景公)은 안영의 간언을 받아들였다.

공자를 불러 말했다.

- 나는 이제 늙었소. 그대를 등용할 수가 없소.

이에 공자는 제(齊)나라를 떠나 다시 노나라로 돌아왔다.

공자가 학숙(學塾)을 열고 제자들을 받아들여 일종의 교단(敎團)을 이루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제(齊)나라에서 거절당하다시피 귀국한 공자였지만 그는 안영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그 자신 제나라와 노나라의 풍속이 다르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는 안영(晏嬰)을 칭찬했다.

<논어>에 이런 구절이 있다.

안평중은 사람을 잘 사귄다.

오래 지나도 상대에게 경의를 잃는 일이 없다.

하지만 역시 정나라 명재상 자산(子産)을 극찬한 것에 비하면 상당히 미약하다. 단 한 구절밖에 나와 있지 않다. 아무래도 사상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공자(孔子)가 귀국했을 때 노나라를 세 조각으로 나누어가진 삼환의 대표자는 계손의여(季孫意如), 맹손무기(孟孫無忌), 숙손주구(叔孫州仇)였다.

그런데 이무렵 노(魯)나라에 또 하나의 이상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삼환인 계손씨, 맹손씨, 숙손씨의 가재(家宰)들이 자신의 주인들을 제치고 또 다른 권력자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삼환(三桓)이 군주의 실권을 빼앗았듯 가신들이 삼환의 실권을 빼앗아버린 것이었다. 명을 내려도 가재들이 수락하지 않으면 아무도 따르는 사람이 없었다.

이 무렵의 삼환과 그 가신들의 관계를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계손의여의 식읍은 비읍(費邑)이었으며, 그 관리자는 공산불뉴(公山不狃)였다.

맹손무기의 식읍은 성읍(成邑)으로, 그 관리자는 공렴처보(公斂處父)였다.

숙손주구의 식읍은 후읍(郈邑)으로, 그 관리자는 약묘(若貓)였다.

삼환(三桓)이 소유하고 있는 이 세 성은 높고 튼튼하기가 노(魯)나라 도성인 곡부(曲阜)에 조금도 뒤짐이 없었다. 그래서 노나라에는 네 개의 도성이 있는 듯했다. 삼환의 가신 중 가장 강성하고 횡포한 자는 계손의여의 살림을 맡아보는 공산불뉴(公山不狃)였다.

계손의여의 가신 중에 또 한 사람의 실력자가 있었다.

양호(陽虎)라는 가재였다. 양호는 <논어>에서 '양화(陽貨)'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양호(陽虎)는 공산불뉴 못지않은 카리스마를 갖고 있었던 모양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어깨가 수리 같았고, 이마가 매우 넓었다고 한다. 그는 장성하여 키가 9척이 넘었고, 힘도 세었으며, 꾀도 많았다.

그는 공산불뉴와 더불어 계손씨의 재산을 독단적으로 관리했다.

그들의 권한은 점차 커져 마침내는 주인인 계손의여를 능가하게 되었다.

공자 나이 42세 때인 BC 510년에 노소공(魯昭公)이 제나라 땅에서 죽었다.

재위 32년이라고는 하지만 말년의 8년간은 군주자리에서 쫓겨난 상태로 있었다. 노소공이 죽자 노나라의 실권자 계손의여(季孫意如)는 노소공의 동생 송(宋)을 군주로 올렸다.

그가 노정공(魯定公)이다.

노정공 5년인 BC 505년, 계손의여가 죽고 그 아들 계손사가 계손씨의 당주자리에 올랐다. 이 해는 초나라가 진(秦)나라의 도움을 받아 오나라에 빼앗겼던 수도 영성을 되찾은 해이다.

당주가 바뀌는 어지러운 틈을 타 양호(陽虎)는 자신의 권한을 더한층 강화했다. 신임당주인 계손사를 감금하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계손사는 양호와 협정을 맺고 풀려나는 수모를 겪었다.

결국 계손사는 가신인 양호에게 지배당하는 기묘한 처지에 놓인 셈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어쩌랴. 현실적으로 힘을 가진 자는 양호인 것을.

이렇듯 노(魯)나라 국정이 일개 평민이라 할 수 있는 가재(家宰)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자 노나라 전역에서는 정도에서 벗어난 일들이 비일비재(非一非再) 생겨나기 시작했다.


제 36장 공자(孔子)시대 (4)


이 무렵, 노나라에 교묘한 변설가가 있었다.

소정묘(少正卯)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소정묘는 지식이 풍부하고 언변 또한 청산유수였다. 그래서 삼환(三桓)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그를 존경했다.

그런데 소정묘(少正卯)는 알고 보면 표리부동(表裏不同)하기가 비상한 사람이었다. 예를 들면 이러했다.

계손사나 맹손무기 등 삼환의 당주들을 만났을 때는,

- 경(卿)들이 군주와 나라를 위해 애쓰시는 공로는 실로 하늘보다 높습니다. 라고 추켜세웠다.

그러나 돌아서서 삼환의 가신들인 양호(陽虎) 등을 만났을 때는,

- 이래서야 나라 꼴이 되겠소? 어떻게 해서든 조정의 실권을 주공에게 돌려주어야 하오. 그러기 위해서는 그대 같은 사람이 삼환(三桓)을 몰아내야 하오.

라고 부추겼다.

소정묘(少正卯)의 이간질로 인해 삼환의 당주들과 그 가신들 사이에는 더욱 미움과 의심의 골이 깊어갔다. 그러나 아무도 소정묘의 이러한 음흉함을 알지 못했다.

날이 갈수록 양호의 전횡이 심해지자 계손사(季孫斯)는 급기야 맹손무기를 찾아가 의논했다.

"어떻게 하면 안팎의 근심을 없애고 예전같이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소?"

그 무렵 맹손무기(孟孫無忌)는 공자의 학숙에 들어가 예(禮)를 배우던 중이었다.

그는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공자(孔子)는 학식이 높을 뿐 아니라 어질기까지 한 사람입니다.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 세우려면 공자를 등용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계손사(季孫斯)는 곧 공자를 불러 하루 종일 그와 대화를 나누어보았다.

과연 그의 마음과 도량은 바다와 같아서 그 밑바닥을 엿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한창 얘기를 나누는 중에 마침 자신의 영지인 비읍에서 사람이 왔다.

계손사(季孫斯)는 안으로 들어가 비읍에서 온 가신을 만나보았다. 가신이 말했다.

"이번에 우물을 파게 되었는데, 땅 속에서 양 한마리가 나왔습니다. 땅 속에서 어떻게 양이 나오게 되었는지 알 수 없어 이렇듯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계손사(季孫斯)는 공자의 학식을 시험해보고 싶었다.

그는 다시 접견실로 나와 공자에게 물었다.

"제 영지에서 어떤 백성이 우물을 파다가 땅 속에서 개 한마리를 얻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일부러 양을 개로 바꿔 말한 것이었다.

그러자 공자(孔子)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땅 속에서 나온 것은 개가 아니라 양일 것이오."

계손사(季孫斯)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그것이 양인 줄 어떻게 아셨습니까?"

"내가 듣건대 산에 사는 요괴는 다리가 하나인 기(蘷)와 망량(魍魎)이고, 물에 사는 요괴는 용(龍)과 망상(罔象)이고, 흙 속에 사는 요괴는 분양(墳羊)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번에 우물을 파다가 땅 속에서 나온 짐승은 양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분양이란 어떤 짐승입니까?"

"분양(墳羊)은 양처럼 생겼지만 암컷도 수컷도 없습니다. 그것이 특징이지요."

계손사(季孫斯)는 안으로 들어가 비읍에서 온 가신에게 물었다.

"땅 속에서 나온 양이 암컷이더냐, 수컷이더냐?"

"이상한 일입니다. 그것은 암컷도 수컷도 아니었습니다."

계소사는 다시 한 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누가 공자의 학문에 미칠 수 있으랴!"

그러고는 공자에게 간곡히 청했다.

"그대의 깊은 학문으로 나를 도와주시오."

하지만 공자(孔子)는 그 무렵 학숙(學塾)을 운영하고 있었다. 많은 제자들과 더불어 글을 읽으며 학문 연구에 전념하고 있었다.

"아직은 제가 나설 때가 아닙니다."

공자(孔子)는 모호한 대답을 남기고 자신의 학숙으로 돌아갔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일개 신하의 권력욕 충족을 위해 쓰고 싶지는 않았으리라.

그런데 계손사와의 이 대화로 인해 공자의 학식에 관한 소문은 널리 퍼져나갔다.

이런 일화도 있다.

멀리 남쪽 초(楚)나라에까지도 공자의 이름이 알려졌다.

어느 날, 초소왕은 사신을 보내 많은 예물을 공자에게 바치고 물었다.

- 지난날 과인이 강을 건너다가 물에서 이상한 과일을 건졌는데, 크기는 말(斗)만하고 빛깔은 해처럼 붉었으며 쪼개어 먹어본즉 그 맛이 꿀 같았습니다. 그것이 무슨 과일인지요?

공자(孔子)가 대답했다.

- 그것은 평실(萍實)이란 과일이오.

- 평실은 언제든지 구할 수 있습니까?

- 그렇지 않소. 평(萍)이라는 것은 물에 떠다니는 풀인데, 뿌리가 없소. 그것이 어쩌다가 서로 만나 엉키고 엉키어 열매를 맺는 것이오. 그러므로 백 년이나 천 년에 한 번 열릴까 말까이오.

- 초왕께서 그 평실을 얻었다는 것은 흩어진 것이 모이고 쇠잔한 것이 다시 일어난다는 징조요. 초(楚)나라를 위해서는 축하할 일이오.

사신은 초나라로 돌아가 초소왕에게 공자의 말을 전했다.

초소왕(楚昭王)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더욱 초나라 재건에 힘을 기울였다고 한다.

공자의 학문과 사상이 차츰 세상에 알려지면서 그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또 한 사람이 있었다.

다름 아닌 양호(陽虎)였다.

그 무렵 양호(陽虎)는 더 큰 야심을 품고 있었다.

계손씨의 가재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아예 난을 일으켜 자신이 직접 노(魯)나라 재상에 오르리라 결심했다. 그리하여 그는 숙손씨의 서자로 천대를 받고 있는 숙손첩(叔孫輒)이라는 인물을 포섭했다. 또 비읍의 관리인인 공산불뉴(公山不狃)에게도 자신의 뜻을 밝혔다.

그러나 그들만 가지고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세상 인심이 자신을 지지해줄지 장담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도 모든 계획을 세우고 실행할 모사(謀士)가 절실했다. 이 두가지 모두를 해결해줄 적임자로 양호(陽虎)는 공자를 점찍은 것이었다.

'공자만 나의 편이 되어준다면.................?'

그의 학숙에서 학문을 배우고 있는 수많은 제자들까지 거느리게 되는 것이다.

그때부터 양호(陽虎)는 수시로 사람을 보내 공자에게 면회를 청했다.

하지만 계손사의 초청도 거절한 그가 아니던가.

공자(孔子)는 양호의 면회를 번번히 거절했다.


 제 36장 공자(孔子)시대 (5)

아무리 해도 공자(孔子)를 만날 수 없자 양호(陽虎)는 한 꾀를 내었다.
돼지 한 마리를 삶아서 공자(孔子)의 집으로 보냈다. 
당시 관례로는 선물을 받으면 몸소 상대의 집에 가서 감사의 인사를 올리는 것이 도리였다. 양호는 그때를 노려 공자를 설득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공자(孔子)도 빈틈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제자 한 사람을 불러 말했다.
"양호(陽虎)가 나를 꾀려고 돼지를 보냈구나. 선물을 받은 이상 그에게 가서 인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너는 양호의 집 문 앞에 숨어 있다가 그가 외출하거든 내 명자(名刺)를 그 집 문 안에 집어넣고 오라."
명자란 오늘날의 명함과 같다.
제자는 공자가 시키는 대로 양호의 집으로 달려가 그가 없을 때 대문을 두드려 명자(名刺)를 전해주고 왔다. 이리하여 끝내 양호(陽虎)는 공자를 끌어들이지 못했고, 공자는 양호의 유혹을 물리쳤다.
공자(孔子)는 양호가 머지않아 난을 일으킬 것임을 예감했다.
자신의 제자라 할 수 있는 맹손무기(孟孫無忌)를 불러 은밀히 암시했다.
"아무래도 조만간 난리가 일어날 것 같습니다. 미리 대책을 강구해 두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공자의 이 같은 말에 맹손무기(孟孫無忌)도 대뜸 '양호의 난'을 짐작했다.
그는 곡부성 남문 밖에다 집을 짓는다는 핑계를 대고 좋은 재목을 골라 넓은 목장을 만들었다.
그런 후에 씩씩한 장정 3백 명을 뽑아 목장을 지키게 했다. 또한 그는 공렴처보(公斂處父)에게 사람을 보내어 지시했다.
"군사들을 완전 무장시키고 대기하라. 내가 기별하거든 즉시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와 나를 도우라."
BC 502년(노정공 8년) 10월.
마침내 양호(陽虎)는 삼환을 제거하고 자신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음모를 실행에 옮겼다. 그의 계획이란 이런 것이었다.
'계손사를 죽이고 그 동생 계오(季寤)로 계손씨의 당주가 되게 하고, 숙손주구를 죽여 그 서자 숙손첩(叔孫輒)을 숙손씨의 당주에 오르게 하고, 맹손무기를 죽여 내가 맹손씨를 장악하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가장 강적인 계손사(季孫斯)부터 없애야 했다.
매년 10월이면 노나라 공실에서는 체제(禘祭)를 올린다.
체제란 나라의 큰 행사로 종묘에서 지내는 제례를 말한다. 
노나라 재상인 계손사(季孫斯)는 체제를 준비하고 주관한다. 무척 힘들고 바쁜일인지라 체제가 끝난 후에는 연회를 베풀어 수고한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다.
양호(陽虎)는 바로 이 위로연을 이용하기로 했다.
계손사를 찾아가 말했다.
"체제(禘祭)가 끝난 다음날 제가 주인을 위해 포포(蒲圃)에서 연회를 준비하겠습니다. 꼭 참석해주십시오."
포포(蒲圃)는 곡부성 동문 밖에 있는 농원으로 계손사의 소유지였다.
평소 양호가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계손사(季孫斯)는 별 의심 없이 양호의 초청을 승낙했다.
그런데 양호(陽虎)가 계손사를 위해 연회를 주관한다는 소문을 듣고 의심을 일으킨 사람이 있었다. 바로 공자로부터 주의를 들은 맹손무기였다.
'어쩐지 수상하다.'
맹손무기(孟孫無忌)는 위험을 직감하고 자신의 식읍인 성읍 관리자 공렴처보에게 편지를 내었다.
- 체제(禘祭) 다음날 정오까지 군사 일대를 거느리고 남문 밖 농장으로 달려오라. 오는 도중 수상한 사태가 벌어지면 임의로 행동해도 무방하다.
종묘 제사는 무사히 끝났다.
그 다음날이었다.
애초의 계획대로 양호(陽虎)는 계손사를 데리러 그의 집으로 갔다. 계손사(季孫斯)는 포포로 나가기 위해 수레에 올랐다.
양호(陽虎)가 먼저 출발했고, 그 뒤로 계손사의 수레가 양호의 동생 양월의 호위를 받으며 따랐다. 
그런데 집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계손사(季孫斯)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자신의 수레를 호위하는 자들이 사뭇 긴장하고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마치 싸움터에라도 나가는 듯한 비장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상하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니다 다를까. 모두가 양호의 친인척들 뿐이었다. 다만 수레를 모는 임초(林楚)만이 자신의 심복 부하였다.
그제야 속으로 아차, 한 계손사(季孫斯)는 어자 임초를 향해 조그만 목소리로 속삭였다.
"임초야, 너는 동문으로 수레를 모는 척하다가 능히 남문 밖 맹손씨의 목장으로 달려갈 수 있겠는냐?"
임초(林楚)도 호위 병사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는 계손사의 뜻을 알아차리고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수레가 큰 거리로 나섰다. 동문과 남문으로 갈라지는 길목에 들어섰을 때였다.
별안간 임초(林楚)가 말머리를 남쪽으로 돌리며 채찍을 들어 말등을 후려쳤다. 놀란 말들은 크게 울부짖으며 수레를 이끌고 남문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놀란 것은 뒤따라오던 호위 책임자 양월이었다. 그는 갑자기 계손사(季孫斯)의 수레가 남문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보고 큰소리로 외쳤다.
"멈춰라. 수레를 멈춰라!"
임초(林楚)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더욱 세차게 채찍을 휘둘렀다.
그제야 계손사(季孫斯)가 달아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양월은 미친듯이 뒤쫓아가며 화살을 쏘았다. 그러나 계손사의 수레가 어찌나 빠르게 달아나는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계손사의 수레가 남문을 빠져나가 맹손무기의 목장 안으로 뛰어드는 데 성공했다. 계손사(季孫斯)는 맹손무기의 방으로 뛰어들어가며 숨이 턱에 차도록 외쳐댔다.
"맹손은 나를 도와주시오. 나는 지금 쫓기고 있소."
이미 모든 것을 예감하고 있었던 맹손무기(孟孫無忌)는 곧 목장의 장사 3백 명을 담장 밑에 매복시켰다. 조금 지나자 과연 양월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목장을 습격해왔다.
맹손무기(孟孫無忌)는 그들이 가까이 접근하기를 기다렸다가 30여 보쯤에 이르렀을 때 장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활을 쏘라!"
수백 대의 화살이 양월을 향해 날아갔다.
멋모르고 선두에 서서 목장을 향해 달려오던 양월은 눈 깜짝할 사이 고슴도치가 되어 수레에서 떨어져 죽었다. 그 부하들도 반 이상이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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