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國誌] 2부 장강의 영웅들 (284) 공자(孔子)시대 (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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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6장 공자(孔子)시대 (6)
그 시각.
앞서 동문을 향해가던 양호(陽虎)는 문득 뒤따라와야 할 계손사(季孫斯)의 수레가 보이지 않음을 알았다. 양월과 그 부하들도 찾아볼 수 없었다.
'혹시........?'
양호(陽虎)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얼른 수레를 돌려 왔던 길을 다시 달렸다. 큰 거리까지 돌아갔으나 여전히 계손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다.
길가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재상의 수레를 보지 못했는가?"
행인들이 대답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재상의 수레를 몰던 말들이 놀라 남문 쪽으로 달려갔습니다."
양호(陽虎)가 남문을 향해 달려가려는데 마침 겨우 목숨을 구한 양월의 부하들이 도망쳐왔다.
"양월 나리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양호는 불같이 노했다.
"내가 삼환(三桓)을 죽여 생짜로 간을 씹어 먹으리라."
그는 부하들을 거느리고 공궁으로 달려가 영문 모르는 노정공(魯定公)을 끌어내었다.
"당장 궁중 군사를 소집하여 맹손씨(孟孫氏)를 공격하게 하시오."
노정공을 인질로 잡은 것은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궁을 나오는데 마침 숙손주구가 입궁하고 있었다.
양호(陽虎)는 칼을 뽑아 숙손주구의 목에 대고 말했다.
"경은 곧 경의 가병들을 이끌고 나를 도우시오."
숙손주구(叔孫州仇)는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가 가병을 거느리고 양호의 뒤를 따랐다.
궁중 군사와 숙손씨의 가병을 확보한 양호(陽虎)는 곧장 남문 밖으로 나가 맹손무기의 목장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맹손무기(孟孫無忌)는 활을 쏘며 대항했다.
양호가 멀리서 명했다.
"목장 담장에 불을 질러라!"
담장은 판자로 만들어져 삽시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사태가 위급해지자 맹손무기(孟孫無忌)는 하늘의 해를 쳐다보며 발을 굴렀다.
"공렴처보야! 어찌 정오가 되었는데 달려오질 않는 것이냐?"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저쪽 동편에서 한 무리의 군사가 나타났다. 성읍 관리인인 공렴처보(公斂處父)와 그 군사들이었다.
"양호(陽虎)는 우리 주인을 해치지 마라. 여기 공렴처보가 왔노라!"
양호의 부하들과 공렴처보의 군사들 사이에 한바탕 싸움이 일었다. 싸움은 백중세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공렴처보(公斂處父)가 밀리기 시작했다.
그때 양호에게 강제로 끌려왔던 숙손주구(叔孫州仇)가 별안간 큰소리를 질러댔다.
"숙손씨의 가병들은 속히 역적 양호(陽虎)를 쳐라!"
그러고는 재빨리 인질이 되어 있던 노정공을 빼앗아 서쪽으로 달아났다.
동시에 맹손무기(孟孫無忌)가 3백 장사들을 거느리고 목장 안에서 달려나왔다. 뒤늦게 계손사의 가병들도 주인을 구하기 위해 달려왔다.
눈깜짝할 사이에 전세는 역전되었다.
양호(陽虎)는 자신의 계획이 틀어진 것을 직감했다.
"퇴각하라!"
결국 양호는 곡부성을 탈출하여 양관(陽關)으로 도망쳤다. 양관은 지금의 태안현 동남쪽 땅이다.
그는 그 곳에서 재기를 노렸다.
그러나 이듬해 6월, 계손사(季孫斯)는 삼환(三桓)의 군대를 총동원하여 양관을 공격했다. 그 싸움에서도 양호는 패했다. 그는 더 이상 노(魯)나라에서 살 수 없게 되자 관문 밖에 불을 지르고 제(齊)나라로 망명했다.
그는 제경공(齊景公)에게 가서 말했다.
"신이 소유하고 있던 양관(陽關) 땅을 제나라에 바치겠습니다. 군후께서는 군대를 동원하여 노나라를 쳐주십시오."
제경공은 양관 땅이 탐이 나 양호의 청을 승낙하려 했다.
그때 제나라 6경 중의 한 사람인 포국(鮑國)이 간했다.
"양호(陽虎)는 간사한 자입니다. 가신으로서 그 주인을 치려 했고, 이제는 남의 나라 힘으로 자기 나라를 치려 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를 용납하면 그 화(禍)는 우리 제나라에 미칠 뿐입니다. 차라리 양호를 잡아 노(魯)나라로 보내십시오."
이에 제경공(齊景公)은 양호를 잡아 서쪽 변방에 가두었다.
그러나 양호(陽虎)는 집요한 자였다.
그는 옥리를 매수하여 술을 먹인 후 탈출했다. 짐수레를 훔쳐 타고 송(宋)나라를 거쳐 친(晉)나라로 달아났다. 진나라에서 그는 진나라 6경 중 한 사람인 조앙(趙鞅)의 가신이 되었다.
이로써 '양호의 난'은 완전히 가라앉았다.
양호가 조앙에게 몸을 의탁했다는 소식을 듣고 공자(孔子)는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 진(晉)나라 조씨는 대대로 소란스러울 것이다. 사악한 자를 받아들여 가신으로 삼았으니, 어찌 혼란이 일지 않겠느냐는 탄식이었다.
양호(陽虎)가 제나라를 탈출하여 진(晉)나라로 도망간 다음해인 BC 500년(노정공 10년) 여름, 제(齊)나라와 노(魯)나라 사이에 평화협정이 맺어졌다.
이 협정은 양호(陽虎)로 인해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즉 제경공(齊景公)은 양호의 제나라 탈출이 고의가 아님을 해명할 필요가 있었고, 노(魯)나라는 노나라대로 양호의 청을 들어주지 않은 것에 대한 감사의 표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양측의 뜻이 부합되어 제경공과 노정공은 협곡(夾谷)에서 회동하여 맹회를 열고 우호를 두터이 하기로 합의했다. 협곡은 축기(祝其)라고도 불리는 땅으로, 지금의 산동성 박산현 남쪽 일대다.
그런데 이 협곡 회맹과 관련하여 공자(孔子)에 관한 또 하나의 일화가 전해온다.
제 36장 공자(孔子)시대 (7)
제 36장 공자(孔子)시대 (8)
공자는 대사구(大司寇)라는 높은 벼슬에 올랐지만, 기실 그의 정치적 후원자이자 동반자는 삼환(三桓) 중의 하나인 계손사(季孫斯)였다.
그 무렵, 공자의 학숙에는 많은 제자들이 몰려들어 학문을 배우고 있었는데, 공자(孔子)는 그 중 유능한 제자들을 계손사(季孫斯)에게 천거했다.
이를테면 공자의 학숙(學塾)은 정치인을 배출해내는 사관학교나 다름없었다.
공자(孔子)가 계손사에게 천거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자로(子路)와 자유(子有)를 꼽을 수 있다. 자로는 이름이 중유(仲由)로, 노나라 변(卞) 땅 사람이다.
공자보다 나이가 아홉 살 아래다.
자로(子路)는 성질이 거칠고 용맹을 좋아하였으며, 심지(心志)가 굳기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다. 수탉의 꼬리로 관을 만들어 쓰기도 했고, 수퇘지의 가죽으로 주머니를 만들어 허리에 차고 다녔다.
그는 공자의 제자가 되기 전에는 시정 불량배였다.
심지어는 공자를 우습게 여기고 그를 때리려고까지 했다.
그러나 공자(孔子)가 예(禮)로써 대하며 인(仁)의 세계를 행동으로 보여주자 조금씩 바른길로 들어섰으며, 마침내는 유복(儒服)을 입고 제자가 되기를 청했다.
자로(子路)는 공자와 마찬가지로 정치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어느 날 자로가 공자에게 물었다.
- 어떻게 하면 정치를 잘할 수 있습니까?
공자(孔子)가 대답했다.
- 백성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를 솔선수범하고, 백성들의 일에 몸소 애쓰는 것이 정치를 잘하는 것이다.
자로(子路)는 그 대답이 성에 안 찼던지 다시 물었다.
- 그것뿐입니까? 더 보탤 것은 없습니까?
- 있다. 시종여일(始終如一)이 바로 그것이다.
아는 것을 행하되, 처음과 끝을 같게 하라.
'지행합일(知行合一)'과 '꾸준한 실천'을 강조하는 공자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또 다른 제자 자유의 이름은 염구(冉求)다.
염구는 공자보다 29년 연하다. 자유(子有)도 공자로부터 늘 행(行)의 중요성에 대해 강론을 들었다.
그런데 자유(子有)는 성격이 신중하고 조심스러웠던 모양이다. 성품이 거친 자로(子路)와는 대조적이었다.
공자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어 자로와 자유에 대해 다른 식으로 강론을 펼친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자유(子有)가 물었다.
- 의(義)를 들었으면 바로 행해야 합니까?
공자(孔子)가 대답했다.
- 바로 행해야 한다.
자로(子路)도 공자에게 같은 물음을 던졌다.
- 의를 들었으면 바로 행해야 합니까?
그러자 공자가 대답했다.
- 부형(父兄)이 계시는데, 어찌 곧바로 의를 행할 수 있겠느냐?
그래서는 안 된다는 대답이었다.
두 사람에 대한 대답이 다르다는 것을 안 또 다른 제자 자화(子華)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 감히 선생님께 여쭙겠습니다. 물음은 같은데, 어찌하여 대답은 다릅니까?
공자가 웃으며 대답했다.
- 자유(子有)는 머뭇거리는 성품이라 진취성을 불러 일으키려는 것이었고, 자로(子路)는 남에게 이기려고만 들기 때문에 억제시켜 주려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자로(子路)나 자유(子有)는 공자의 천거를 받아 계손씨의 신하가 되어 정치 일선에 뛰어든 대표적인 제자들이었다.
노(魯)나라의 수난은 그치지 않았다.
계손사의 가재인 양호(陽虎)가 난을 일으켰다가 실패로 돌아간 지 4년 후인 BC 498년(노정공 12년).
이번에는 공산불뉴(公山不狃)가 또 난을 일으켰다.
공산불뉴 역시 계손사의 가신장(家臣長)으로 계손씨의 식읍인 비읍(費邑)을 관리하고 있었다. 그 과정은 이러하다.
그해 여름, 계손사(季孫斯)는 공산불뉴가 지나치게 강성해지자 몹시 불안했다. 그래서 공자를 불러 의논했다.
"공산불뉴(公山不狃)가 양호를 본떠 또 반란을 일으키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좋은 방법이 없겠습니까?"
공자(孔子)가 대답했다.
"오늘날 가신이 강성해진 것은 예법과 제도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신하가 가병을 둘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성(城)을 소유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신들이 반란을 일으킬 근거를 차단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경대부는 어떠합니까? 각자 성읍(城邑)을 소유하고 군사를 기르고 있지 않습니까? 만일 경대부들에게 가병과 성읍이 없다면 어찌 가신들이 반란을 일으킬 꿈을 꾸겠습니까?
그대는 비읍(費邑)을 공실에 반납하십시오. 그러면 상하가 편안하고 반란도 영구히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계손사(季孫斯)는 공자의 말을 옳게 여겼다. 맹손무기와 숙손주구를 불러 삼환(三桓)의 재산 반납을 의논했다.
"공자의 말씀이 맞소. 우리가 재산을 반납하여 집안과 나라가 이롭게 된다면 무엇을 주저하리오."
세 사람은 이렇게 뜻을 모은 후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던 비읍과 성읍을 공실에 반납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소정묘(少正卯)가 알았다. 그는 앞에 얘기한 바와 같이 앞에서와 뒤에서의 말이 다른 사람이었다. 더욱이 노정공과 삼환의 신임을 받고 있는 공자(孔子)를 몹시 시기하고 있었다.
소정묘는 삼환(三桓)이 재산을 반납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자 자신의 심복인 숙손첩(叔孫輒)을 비읍(費邑)으로 보내 공산불뉴를 부추겼다.
- 조만간 공실에서 비읍의 성을 허물 것이외다. 그렇게 되면 그대는 설 자리를 잃을 것이니, 그 전에 적절한 조치를 취하기 바라오.
공산불뉴(公山不狃)는 자신의 근거지가 소멸될 것에 대해 불안을 느꼈다.
화가 치밀기도 했다. 그러나 섣불리 군사를 일으켰다가는 양호의 꼴이 되고말 것이 뻔했다.
그는 고심 끝에 노나라 상하의 존경을 받고 있는 공자(孔子)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리라 결심했다. 사람을 시켜 많은 예물을 공자에게 보내며 말을 전했다.
- 잠시 비읍(費邑)을 다녀가심이 어떠하신지요? 선생의 인의지도(仁義之道)를 배우고 싶습니다.
공산불뉴(公山不狃)가 공자를 끌어들이려 한 것은 양호와 같은 수법이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면 양호는 잔꾀로써 공자를 끌어들이려 했으나, 공산불뉴는 정식으로 그를 초빙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공자(孔子)는 공산불뉴에게로 가지 않았다.
정중히 예물과 초청장을 비읍으로 돌려보냈다.
공자가 초청에 응하지 않음으로써 공산불뉴(公山不狃)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이제 단 하나뿐이었다.
'순순히 물러나지는 않겠다.'
그는 군사를 모으기 시작했다.
공산불뉴는 맹손씨의 가신장인 공렴처보(公斂處父)와 숙손씨의 가신장인 약묘(若貓)에게 통보하여 함께 곡부성으로 쳐들어가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공렴처보와 약묘는 공산불뉴의 청을 거절했다. 하는 수 없이 공산불뉴(公山不狃)는 단독으로 곡부성을 칠 계획을 꾸몄다.
그러할 때 숙손주구의 식읍인 후읍(郈邑)에서 뜻하지 않은 변이 생겼다.
숙손씨의 가재인 약묘(若貓)가 그 부하 후범이란 자에게 살해당한 것이었다. 후범(侯犯)은 약묘와 달리 힘이 장사이고 포악했다. 그는 약묘를 죽이고 자신이 후읍의 장(長)이 되었다.
이에 숙손주구(叔孫州仇)는 후범을 치기 위해 맹손씨에게 도움을 청했다.
양가는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후읍으로 쳐들어갔다. 후범(侯犯)은 결사적으로 저항했다. 후읍의 군사들이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바람에 숙손씨와 맹손씨는 좀처럼 그들을 토벌할 수 없었다.
비읍(費邑)에서 군사를 기르며 곡부성을 칠 기회만 노리고 있던 공산불뉴의 눈에 이것은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로 비쳤다.
'숙손씨와 맹손씨가 모두 후읍으로 달려갔으니 곡부성에는 계손씨(季孫氏)만이 외로이 남아 있겠구나. 내 어찌 이 기회를 놓칠 수 있으랴.'
공산불뉴(公山不狃)는 군사를 거느리고 곡부성으로 쳐들어갔다.
심복인 숙손첩(叔孫輒)이 성문을 열고 영접해주었다.
공산불뉴(公山不狃)는 곧장 공궁을 향해 달려갔다.
다급한 것은 노정공이었다. 그는 즉시 공자를 불러 의논했다.
"비읍의 반란군이 도성 안으로 쳐들어왔으니, 대관절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공자(孔子)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궁중 군사는 허약합니다. 일단 궁을 나가 계손씨의 집으로 피신하십시오."
노정공(魯定公)은 공자
제 36장 공자(孔子)시대 (9)
노정공(魯定公)이 계손사(季孫斯)의 집으로 몸을 피한 같은 시각. 공산불뉴(公山不狃)는 공궁을 공격하고 있었다.
궁중 수비대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공산불뉴는 숙손첩의 안내를 받아 내궁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궁중 어디에도 노정공(魯定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노정공(魯定公)이 계손사의 집으로 피신했다는 것을 알고 다시 군사를 몰고 계손사의 집으로 향했다. 반란군이 대문을 부수고 대(臺) 위로 올라가려는데, 문득 한 사내가 그 앞에 버티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공자였다.
반란군은 대부분 비읍(費邑)의 백성들이었다.
그들은 공자(孔子)가 백성들에게 많은 덕을 베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했다. 공자를 보자 주춤하며 자신들도 모르게 공손한 태도를 취했다.
그때 공자의 입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너희들은 농사를 짓는 백성들이다. 주공이 여기 계신데, 너희들은 어찌 순리를 거스르려 하는 것이냐? 속히 무기를 버려라. 그러면 지금까지의 잘못은 처벌하지 않겠다."
주변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반란군은 하나 둘씩 칼을 버리고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이러한 급변에 당황한 것은 공산불뉴(公山不狃)였다.
"무엇들 하느냐? 어서 대(臺) 안으로 진입하라!"
악을 써댔으나 몇몇 군사만 그에 호응할 뿐 대부분의 군사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공산불뉴(公山不狃)는 악에 받쳐 직접 대 위로 뛰어올라가 공자를 베려 했다.
그 순간 좌우에 매복해 있던 사마 신구수(申句須)와 악기(樂頎)가 뛰어나오며 외쳤다.
"역적은 함부로 성인의 몸에 더러운 손을 대지 마라!"
공손불뉴(公山不狃)는 기겁초풍했다.
그는 좌우에 계손씨의 가병이 매복되어 있음을 알고 재빨리 몸을 돌려 밖으로 달아났다. 이어 숙손첩(叔孫輒)이 그 뒤를 따랐다.
겨우 곡부성을 빠져나온 그들은 황급히 말머리를 돌려 오(吳)나라를 바라보고 달아났다. 이로써 '공산불뉴의 난'은 진정되었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맹손무기와 숙손주구도 후범의 난을 진압했다.
후범(侯犯)은 겨우 탈출하여 제(齊)나라로 망명했다.
양호에 이어 공산불뉴, 후범 등의 난이 연이어 일어남에 따라 계손사(季孫斯)와 맹손무기(孟孫無忌), 숙손주구(叔孫州仇)는 서둘러 자로(子路)를 보내어 각 식읍의 성을 허물고 높이를 세 척쯤 낮추었다.
계손사를 비롯한 삼환(三桓)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으나 공자는 이 모든 게 소정묘의 농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공자(孔子)는 모든 신료들이 모인 자리에서 대사구의 자격으로 소정묘(少正卯)를 탄핵했다.
"지금까지의 모든 것은 소정묘가 교묘한 말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혔기 때문입니다."
공자의 이 같은 말에 신료들은 고개를 갸웃 흔들었다.
"소정묘(少正卯)는 우리 노(魯)나라에서 명성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있는데, 어지 공산불뉴의 난이 소정묘의 농간이라고 하십니까?"
공자(孔子)가 다시 노정공에게 아뢰었다.
"소정묘(少正卯)는 거짓을 참말처럼 말하고, 행동과 말이 같지 않아 알게 모르게 인심을 어지럽혀 왔습니다. 저런 자를 죽이지 않으면 나라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신의 벼슬은 대사구(大司寇)입니다."
그러고는 좌우 무사를 돌아보며 추상같은 명을 내렸다.
"군사들은 저자를 속히 참하지 않고 뭘 하고 있느냐?"
무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소정묘를 결박했다.
결국 소정묘(少正卯)는 궁정 앞뜰로 끌려나가 참수형에 처해졌다. 모든 신하들은 이 광경을 보고 얼굴색이 변했다.
이후로 노(魯)나라 정치에 공자의 뜻이 반영되기 시작했다.
대사구 겸 재상이 된 공자(孔子)는 먼저 궁중 기강을 세우고 관료들에게 예의를 가르쳤으며 염치를 알게 했다. 그러자 백성들의 살림살이는 하루가 다르게 안정되어 갔다.
사마천은 <사기>의 <공자세가(孔子世家)>를 통해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공자(孔子)가 정치를 맡은 지 3개월이 지나자 양과 돼지를 파는 사람들이 가격을 속이지 않았다. 남녀가 길을 갈 때는 따로 걸었으며, 길가에 떨어진 물건을 주워가는 사람도 없어졌다. 사방에서 모여드는 여행자들은 관리에게 허가를 받을 필요가 없었고, 모두 잘 접대를 받아 만족해하며 돌아갔다.
바야흐로 공자의 이상(理想) 정치가 노나라 땅에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이때가 BC 498년(노정공 12년).
공자의 나이 54세 때의 일이었다.
그러나 공자의 이상 정치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공자의 예법과 인의지도(仁義之道)로 인해 노나라가 태평성대를 누리기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아 노나라 공실과 경대부들은 다시 사치와 향락에 빠져버린 것이었다.
노(魯)나라 정치가 다시금 타락의 길로 빠져들게 된 원인으로 재미난 일화가 전해온다.
그 무렵 제(齊)나라는 명재상 안영이 세상을 떠나고 제경공의 총신인 대부 여미(黎彌)가 정책을 입안하고 있었다.
제경공(齊景公)은 노(魯)나라가 하루가 다르게 안정되어가는 것을 보고 몹시 불안해했다.
"공자가 정치를 잘하면 노(魯)나라는 패권을 잡을 것이요, 노나라가 패권을 잡으면 가장 먼저 우리 제(齊)나라를 억압하려들 것이다. 장차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는가?"
대부 여미(黎彌)는 잔꾀를 내는 데 일가견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제경공의 우울한 표정을 보고 아뢰었다.
"주공께서는 공자 때문에 걱정하시면서 어찌 그를 방해할 생각을 하지 않으십니까?"
"내가 무슨 수로 공자의 정치를 방해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주공께서는 신의 계책을 들어보시렵니까?"
"말해보라."
"신이 듣건대 매사가 안정되면 사람은 교만해지고 사치스러워진다고 하였습니다. 주공께서는 노후(魯侯)에게 우호를 두터이 한다는 핑계로 음악 잘하는 미인들을 많이 보내십시오."
"노후(魯候)가 그 미인들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틀림없이 정사(政事)에 게을러질 것이요, 자연히 공자(孔子)를 멀리할 것입니다. 그러면 공자는 노(魯)나라를 버리고 다른 나라로 갈 것이니, 공자 없는 노나라가 어찌 패권을 잡을 수 있겠습니까?"
"묘책이로다!"
제경공(齊景公)은 몹시 기뻐하며 그날부터 전국 각지에서 아름다운 처녀 80명을 뽑아들여 10분대(分隊)로 편성했다. 그리고 그 미인들에게 예쁘게 수놓은 비단옷을 입힌 후 밤낮없이 노래와 춤과 음악을 가르쳤다.
이때 가르친 음악이 '강악(康樂)'이며, 그 춤을 '강악무(康樂舞)'라고 한다.
강악은 전에 없이 아름다운 곡조였으며, 강악무는 황홀하기 그지없어 보는 사람의 넋을 빼놓을 정도였다.
제 36장 공자(孔子)시대 (10)
마침내 제경공(齊景公)은 그 미인들과 양마 120필을 사신에게 딸려 노(魯)나라로 보냈다. 제(齊)나라 사신은 곡부성 남문에 이르러 두 곳에다 비단 장막을 쳤다.
동쪽 비단 장막에는 120필의 말을 매어두고, 서쪽 비단 장막에는 미인들을 머물게 했다. 그러고는 삼환 중의 한 사람인 계손사(季孫斯)의 집으로 향했다.
그 무렵, 계손사(季孫斯)는 나라가 태평하고 걱정 근심이 사라지자 틈만나면 즐거운 일을 찾고 있었다. 그런 중에 제(齊)나라 사신이 와서 미인 악사들을 바치려 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호기심이 일었다.
"내가 한 번 살펴본 후 주공에게 바칠 것인가 어쩔 것인가를 결정하겠다."
계손사(季孫斯)는 평복으로 갈아입고 몰래 남문 밖으로 나가보았다.
제(齊)나라 사신은 미인들이 공연하는 강악과 강악무를 계손사에게 보여주었다. 음악과 노래와 춤은 황홀했다. 노랫소리는 가는 구름을 멈추게 하고, 춤추는 자태에서는 향기가 일었다.
생전 처음 그런 춤과 음악과 노래를 관람한 계손사(季孫斯)는 정신이 빠졌다. 온몸이 녹는 듯하고, 마음이 산란했다. 시간 가는 줄 몰라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저녁이었다.
이튿날 계손사(季孫斯)는 궁으로 들어가 노정공을 알현하고 제나라에서 미인 80명을 보내왔음을 보고했다. 노정공의 눈빛이 달라졌다.
"제(齊)나라에서 왔다는 그 여악(女樂)들은 지금 어디 있소?"
"남문 밖에 머물고 있습니다. 주공께서 보실 생각이시라면 신이 모시고 가겠습니다. 하지만 주공의 행차가 알려지면 백성들이 불편해할 것이니, 미복으로 가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노정공(魯定公)은 평복으로 갈아입고 계손사와 함께 남문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장막 근처에 이르렀을 때였다.
계손사(季孫斯)는 심복 부하 한 사람을 먼저보내 제(齊)나라 사신에게 귀띔했다.
"우리 주공께서 미복 차림으로 오셨소."
제나라 사신은 미인들을 불러놓고 당부했다.
"노(魯)나라 군주가 미복으로 오셨다고 한다. 너희들은 각별히 신경 써서 온갖 재주를 다 보여봐라."
제(齊)나라 미인 악사 80명은 더욱 교태스럽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소매가 나부낄 때마다 장막 안에는 무지개가 서는 듯했다.
10대(隊)의 미녀들은 번갈아 등장하여 자신들의 재주를 마음껏 발휘했다. 평생 고루한 음악만 들어오던 노정공(魯定公) 또한 완전히 정신을 빼앗겼다.
궁으로 돌아온 노정공(魯定公)은 그 날 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
미인들의 노래가 귓전에 맴돌고 춤추는 자태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다음날 아침, 노정공(魯定公)은 혹시나 공자가 제나라에서 보내온 선물을 반대할까 두려워 일부러 계손사만을 부르고 제(齊)나라 사신을 맞아들였다. 노정공은 제나라 사신에게 황금 1백 일을 답례로 하사했다. 미인 악사 80명과 말 120필을 접수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노정공(魯定公)은 80명의 여악 중 30명을 계손사에게 내주고 나머지는 내궁에 머물게 했다.
그때부터 노정공과 계손사(季孫斯)는 각기 낮이면 노래와 춤을 즐기고 밤이면 미인들을 끼고 술을 마셨다. 조회를 여는 것이 귀찮아 열흘이 넘도록 정청으로 나가지 않았다.
이 소식이 공자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리 없었다.
성질 급한 제자 자로(子路)가 공자에게 말했다.
"선생님이여, 이제 노(魯)나라를 떠날 때가 왔나봅니다."
공자(孔子)가 대답했다.
"아직 이르다. 며칠 후면 교제(郊祭)를 올리는 날이다. 주공이 교제를 마치고 나서 그 조(胙)를 대부들에게 나누어주면 이는 희망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조를 나누어주지 않으면 나는 여기를 떠날 것이다."
교제(郊祭)란 남쪽 교외로 나가 하늘에 올리는 제사를 말한다.
참고로 북쪽 교외로 나가 하늘에 올리는 제사는 사제(社祭)라고 한다.
또 조(胙)는 제사를 지낼 때 쓰이는 고기로서, 제사가 끝나면 군주는 신하들에게 그 고기를 나누어주는 것이 관례였다. 신하들에 대한 존중의 표시다.
마침내 교제날이 되었다.
노정공과 계손사 등 문무백관은 남쪽 교외로 나가 하늘에 대한 제사를 올렸다.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노정공(魯定公)은 제사를 지내자마자 부리나케 궁으로 돌아갔다.
제(齊)나라에서 바친 미인 악사들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제사를 지낼 때 쓴 '조(胙)'를 신하들에게 나눠주는 것을 잊고 말았다.
제관이 궁으로 들어가 아뢰었다.
"조(胙)를 나눠주십시오."
노정공은 귀찮은 표정으로 아무렇게나 말했다.
"과인은 바쁘다. 계손사에게 나눠주라고 일러라."
하지만 계손사(季孫斯) 역시 제사가 끝남과 동시에 집으로 돌아가 강악과 강악무를 즐기고 있었다. 결국 조(胙)는 분배되지 않았다.
그 날 밤, 공자(孔子)는 길게 탄식했다.
"아, 나의 진리가 세상에 퍼지지 않았구나. 이것이 하늘의 뜻인가?"
다음날 아침, 공자(孔子)는 여러 제자들을 거느리고 곡부성을 떠났다.
계손사에게 벼슬하던 자로(子路)와 자유(子有)도 관복을 벗어던지고 스승 공자의 뒤를 따랐다.
공자(孔子)가 노(魯)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로 가려 한다는 소문은 계손사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는 깜짝 놀라 악사장 기(己)를 보내 공자를 데려오게 했다. 악사장 기가 서둘러 곡부성을 나섰다.
그때 공자(孔子)는 여러 제자들과 함게 북쪽 교외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기(己)가 뒤쫓아가 공자에게 물었다.
"선생께서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노나라를 떠나시는 겁니까?"
공자(孔子)가 그윽한 눈길로 기(己)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노래로 대답해도 괜찮겠는가?"
그러고는 그 자리에 앉아 거문고를 타며 노래 한 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군주가 여인의 말을 믿으면
군자는 떠나가는도다.
군주가 여인을 가까이하면
사직은 사라지는도다.
이런 그늘 속에서 벗어나 유유자적하며
이렇게 나의 세월을 보내리라.
악사장 기(己)는 공자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알았다.
그가 성안으로 돌아오자 계손사(季孫斯)가 불러 물었다.
"공자가 뭐라고 하던가?"
기가 사실대로 대답하자 계손사는 크게 탄식했다.
"아아, 공자(孔子)는 내가 제나라 무녀(巫女)를 받아들인 것을 책망하고 있구나."
이렇게 공자는 노(魯)나라를 떠나갔다.
이 떠남이 곧 그 유명한 공자의 '천하 역유(歷遊)'다.
이때 공자 나이 56세.
따르는 제자는 수십 명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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